<돈은 있었지만, 시간은 없었다>
정신적 즐거움을 누리는 자는 많은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암 병동의 삶이 그렇다. 정신적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그곳은 궁핍과 절망의 공간이 된다.
지금은 내가 여기에 누워 있지만,
내일은 네가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예고 없이 돌아선다.
병실 밖에 있는 너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살래?"
그러나 너는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이다.
생계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숨을 쉬며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모든 사람에게는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진지하게 되묻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허망하게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했다.
우리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확실한 현재를 희생한다.
앎을 방해하는 장벽은 너무 평범해서,
그것이 방해인지도 모르고 지나친다.
사육당하는 동물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하며 산다.
어떤 이들은 반려동물에 깊은 감정을 쏟는다.
그들은 동물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긴다.
죽음 앞에서의 그들의 애도는 진심이다.
그러나 그 감정의 진위는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무너진다.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다.
죽은 영혼도 섹스를 할까?
먹고 마시며 웃고 울까?
감정과 감각이 작동한다면,
그건 산 자의 상상일 뿐이다.
죽은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불교는 오온개공이라 한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뜻이다.
물질, 느낌, 표상, 의지, 의식 — 모두 사라진다.
하지만 동시에 불교는 윤회를 말한다.
공하다고 해놓고,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것은 말장난이다.
시간은 ‘지금’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
암 병동 무균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정신적 쾌락을 찾는다.
죽어가는 몸이 되어
비로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육체적 쾌락이 얼마나 짧은지를,
지금은 뼈저리게 실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을 가졌다는 뜻이다.
정신적 즐거움이야말로
진짜 즐거움이다.
시간이 있다면,
시간 부자가 진짜 부자다.
시간에서 자유로운 자가
진정한 자유인이다.
나는 몰랐다.
속물처럼, 텅 빈 머리로,
허겁지겁, 정신없이 살아왔다.
돈이 최고인 줄 알았다.
백혈병이 나를 깨웠다.
돈은 있었지만, 시간은 없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잔혹하게 나를 조롱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남이 보는 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노예였다.
생존 본능조차 잊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무언가 큰 공허가 들려왔다.
삶에 대한 구토가 치밀었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실존에 대한 철학적 구역질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철학자들의 사유는 본능을 부정하며,
진실이 없다고 했다.
그 말 속에도 구토가 섞여 있었다.
이제,
나 역시,
내 삶에 구토를 느낀다.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 화, 수, 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긴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