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코끼리 처럼>
남자는 여자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사정을 끝낸 남자는 털고 일어나 자리를 뜬다. 그 뒤에 남는 감정, 책임, 수습은 언제나 여자의 몫이다.
이것은 단지 심리의 차원이 아니다. 생물학적 구조에서 비롯된, 본질적인 차이다.
여자는 몸 안에 생명을 품는다.
대부분의 동물에서 수컷은 교미가 끝나면 떠난다.
암컷은 혼자 새끼를 낳고 기른다. 심지어 자기 새끼조차 외면하는 수컷도 많다.
돌봄은 언제나 암컷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남자를 '개'라 부른다.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는, 본능의 덩어리.
하지만 여자는 개가 아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여자는 매달 피를 흘린다.
한 달에 일주일, 통증과 무기력, 우울과 불쾌함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30년 넘게 반복된다. 그 긴 세월 동안, 여자는 사랑을 감당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는 『여자의 사랑』에서 말했다.
"여자는 생리로 인해 상처받기 쉬우며, 민감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존재다."
어쩌면,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인식 차이는 이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자는 자신을 감싸줄 이에게 마음을 연다.
남자는 자신을 받아줄 이에게 욕망을 느낀다.
남녀 관계를 숫자로 표현한다면,
남자는 그중 7 이상을 욕망에서 출발하고,
여자는 7 이상을 사랑에서 시작한다.
물론 상징일 뿐이지만, 이 차이가 수많은 오해와 고통을 만들어낸다.
성경 속 이브는 말 한마디로 아담을 움직였다.
아담은 결국 그녀의 말에 순종했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똑똑한 여자는 말로 남자를 지배한다.
본능은 힘보다 언어에 더 쉽게 무너진다.
남자는 사랑을 피하고, 여자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결혼하고, 바람피우고, 이혼하고, 다시 혼자가 되는 반복 속에서 남녀는 서로를 다르게 살아낸다.
그러다 문득, 세월이 흐른다.
늙음은 천천히 오는 게 아니다.
어느 날 계단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남자는 발기의 어려움을 느끼고, 사정의 감각이 무뎌지며, 소변을 조절할 힘조차 잃는다.
여자는 생리의 끝을 맞고, 생식의 종언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남녀는 욕망의 시대를 지나온다.
욕정이 사라진 자리엔 평온이 찾아온다.
생명의 반복이 멈춘 그 틈에, 사유가 자라난다.
사랑도, 욕망도 이제는 지나간 풍경처럼 멀어진다.
친구들이 하나둘 떠난다.
장례식이 잦아지고, 어느 날 문득, 자기 차례가 가까워졌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랑도, 미련도 없다.
오직 고독만이 남는다.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
혼자가 삶의 새로운 얼굴이 되고,
때로는 가장 진실한 벗이 된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두려워 마라, 고독이 너와 함께하리라.”
성적 에너지의 소멸은 사유의 문을 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간은
비로소 진실한 성찰에 도달할 수 있다.
좋고 나쁨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
그것이 노년의 철학이다.
그리고 멋지게 늙는다는 것,
그건 바로 그 평정에 있다.
사유를 거부한 자는 늙어서도 바보다.
젊은 시절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허세로 삶을 채우는 노인.
그런 이들이 많을수록
젊은 세대의 눈빛은 점점 냉소로 식어간다.
늙은이는 죽어가는 존재다.
세상의 중심은 더 오래 살아갈
젊은 이들에게 있다.
그들이 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다.
그러니 늙을수록 고독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다음 세대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스스로에 대한 마지막 품격이다.
늙은 코끼리는 무리를 떠나
홀로 죽음의 계곡으로 간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작가 소개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를 화수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