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IF Story>
노아의 방주 사건은 인류를 갈라놓는 서사다.
세상은 물에 잠겼고,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죽었다.
살아남은 자는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 속 생물들뿐.
신은 노아에게 새로운 질서를 허락했다.
이전에는 식물만 먹었던 인류에게
이제는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신이 인간에게
생명에 대한 통제권을 준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노아는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는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이는 둘째 아들 ‘함’이다.
함은 이 사실을 다른 두 형제에게 알렸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외면한 채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을 덮어주었다.
노아는 잠에서 깨어,
아들 함이 아닌, 손자 가나안을 저주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 (창세기 9:25)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잘못을 저지른 건 ‘함’이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건 ‘가나안’이다.
이 부조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성경 해석의 가장 어두운 지점을 파고든다.
성경은 단순히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어에서 ‘보다’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함이 노아를 성적으로 범했거나
노아의 아내(어머니)를 범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분노는 이해된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왜 당사자가 아니라, 손자가 저주를 받아야 했는가?
이 사건은
성경 전체에 반복되는 ‘죄의 유전’ 논리를 상징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
→ 인간 전체가 ‘원죄’를 짊어진다.
함이 금기를 어겼다.
→ 그의 아들 가나안이 대대손손 저주받는다.
이것은 ‘죄는 유전된다’는 논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인류의 차별과 폭력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가나안은
함의 후손,
성경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땅’으로 설명된다.
(창세기 10장, 시편 105-106장)
중세 유럽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가나안의 저주를 ‘흑인의 숙명’으로 해석했다.
흑인은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성경이 말한 질서다.
그렇게 성경은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정당화 도구’가 되었다.
성경은 신의 음성을 자주 등장시킨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신은 침묵한다.
노아는 분노했고,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곧 방조다.
신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노아의 저주가 신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신도 부끄러워 말을 아낀 것일까?
이 사건은 아담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저주받는다.
→ 죗값은 후손에게 이어진다.
함은 무언가를 저질렀다.
→ 저주는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 향한다.
잘못한 자는 벌을 받지 않고,
가까이 있는 자가 벌을 받는다.
이것이 성경의 ‘정의’다.
만약 신이 이 모든 설계를 만들었다면,
그 신은 너무나 졸렬하다.
죄 없는 자를 저주하는 신은
정의의 상징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기제일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이야기는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상상과 권력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 신이 말했는가를 묻기 전에,
그 말을 누가 썼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