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미한 여행 : 제주 경미네 집, 대만 징메이 야시장

세상 어딘가 또 다른 나를 찾아

by 경미로움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절, 홀로 이북에서 내려온 할아버지에게 대를 잇는다는 것과 남아선호사상은 당연했다. 대한민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에 태어난 첫째 손주가 딸이라는 사실은 할아버지에게 가벼운 좌절이었다. 하지만 '남자 같은 이름을 지어주면 둘째는 아들을 낳는다'라는 속설을 믿고 첫째의 이름을 '영수'로 호적에 올렸다. 가족들의 만류로 집에서는 '상미'라 불렸지만, 호적상의 그녀는 엄연히 영수였다.


이듬해 태어난 둘째, 나는 할아버지의 역정 속에 태어났다. 첫째를 영수라 부르지 않아 또 딸을 낳았다며 노발대발하신 할아버지는 작명에서 손을 떼셨고, 내 이름은 가족들의 큰 이견 없이 상미 동생 '경미'가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할아버지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은 시점에 출생신고를 하며 벌어진다.


서울 경(京), 아름다울 미(美).


동경(東京), 북경(北京), 경성(京城), 경기도(京畿道). 수도 지명에서나 쓰이는 그 한자를 옥편에서 대충 골라 휘갈겨 적었을 할아버지의 분노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그래도 나는 이 이름이 좋다. 흔하고 평범한 이름. 특별히 눈에 띄지도, 크게 모나지도 않은 평범한 나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아 애착이 간다.




스물아홉, 인생의 짧은 방학을 보내던 중 제주도 특가 항공권 문자 한 통에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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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하게 제주도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지금이야말로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걸 실행할 적기구나. 눈곱도 떼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최저가 제주행 티켓을 질러버렸다.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는 작은 식당. 해물라면을 파는 이 식당의 이름은 '경미네집'이다. 찌그러진 양푼에 문어, 조개, 미역 등 해산물이 들어간 라면이 나왔다. 해산물을 못 먹는 내가 경미네집에서 해물라면을 먹은 것이다. 이 아이러니를 어쩌란 말인가. 맛은 해물 넣은 라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징이라면 바닷가라 해산물이 신선하다는 것 정도.


그래도 식당을 나와 간판 앞에서 인증 셀피를 찍을 땐 괜히 뿌듯했다.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버킷리스트에 두 줄 완료 표시를 했다.


[제주도 스쿠터 여행하기]

[경미네집에서 해물라면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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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타이완 국제도서전을 핑계로 다시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7년 전 대만 야시장 여행을 하고 ‘매년 대만에 놀러 가야지’ 다짐했지만 길고 긴 팬데믹의 영향으로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낮에는 관광지를 구경하고, 밤이면 어김없이 야시장에서 음식을 탐닉했다. 지난 대만 여행에서 가지 않은 징메이 야시장에 들렀다.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찐만두를 한 팩을 사서 시장 한쪽 공터에 앉았다. 선선한 저녁 날씨를 맞으며 단체로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두를 먹었다. 건강 체조와 춤 경계의 살랑거리는 움직임을 보며 흥겨운 음악을 즐겼다. 카페에선 재즈가 어울리고, 레스토랑에선 클래식이 어울리듯이 야시장 만두에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징메이 야시장(景美夜市). 볕 경, 아름다울 미. 경미 야시장. 징메이 역과 야시장 현판 앞에서 인증 셀피를 찍었다. 그리고 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완료된 버킷리스트 [대만 야시장 가기] 옆에 ‘린지앙, 라오허제, 스린, 닝샤’에 ‘징메이’를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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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십 년 주기로 나는 세상 어딘가에 숨겨진 또 다른 '경미'를 만나고 돌아왔다.

제주의 '경미'가 투박한 바다의 맛이었다면, 대만의 '경미'는 활기차고 다정한 밤의 맛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이 여행지의 풍경과 섞여 나만의 특별한 이정표가 되는 경험.


마흔아홉의 나는 또 어떤 길 위에서 새로운 '경미'를 마주하게 될까. 그때의 나는 어떤 맛을 탐닉하고, 어떤 풍경 속에 나를 기록하고 있을까. 흔해서 더 정겨운 나의 이름처럼, 나의 여행도 그렇게. 평범한 듯 특별하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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