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나게 매울지도 몰라
재환은 경미가 웃기만 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준비가 된 남자였다. 다행히 경미는 현실적인 여자였기에 그에게 무리한 우주 개척을 요구하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소박하고도 확실한 행복을 제안했다.
"오빠, 날씨도 좋은데 주말에 드라이브 가자."
경미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던 재환은 몇 달 전 면허를 땄다. 타고난 운전 센스가 있었는지 초보운전치고는 꽤 매끄럽게 운전했다. 죽녹원이 있는 담양으로 향하는 길, 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다. 사내 연애하는 그들은 함께 아는 이가 많았다. 냉소적인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영업사원 박소장, 자리만 비우면 이때다 싶어 뒷말을 시작하는 디자인팀 이실장, 경미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 배과장. 담양으로 향하는 차 안은 지난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로 가득했다.
"배과장님이 또 나한테 뭐라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 오빠 저기 봐."
한 시간쯤 달렸을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호수를 빙 둘러 길고 긴 차량 행렬 너머 아름드리 벚나무가 줄지어 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벚꽃잎은 자신이 함박눈이라도 된 듯 펑펑 흩날렸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춰 봄을 만끽했다.
"그래서 차가 막혔구나. 우리도 차 세우고 구경하자."
청풍명월의 도시, 제천시
청풍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맑을 청, 바람 풍. 말 그대로 맑은 바람이 부는 호수였다. 재환은 경미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오빠, 근데 담양은 전라도 아니야? 왜 우리 충청북도에 왔지?"
"내비게이션을 잘못 찍었나 봐. '담양'이 아니라 '단양'을 찍었네."
재환은 초보운전다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경미는 개의치 않다는 듯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며 말했다.
"담양이면 어떻고, 단양 옆 제천이면 또 어때. 오빠랑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하지. 매년 봄에 여기로 놀러 오자."
"좋아."
좋아. 그 한마디에 재환의 온 마음이 담겼다. 함께 있다는 게, 매년 청풍호에 오자는 게, 그저 경미가. 마냥 이 순간이. 경미는 담양과 단양, 그 어디에도 닿지 못했지만 좋았다.
마침 제천에선 벚꽃 축제가 열렸다. 시끌벅적한 축제장엔 엿가위를 튕기며 노래하는 엿장수, 맛보고 가라며 뻥튀기를 쥐여주는 상인, 천막 안에 주르륵 진열된 출처 불명의 골동품들. 지역 축제마다 만날 수 있는 풍선 다트와 사격 게임. 한참 동안 벚꽃 눈 흩날리는 축제장을 구경했다. 축제에 평생 처음 와본 아이처럼 신나 하는 재환을 바라보며 경미는 이 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맑은 바람이 부는 제천을. 맑은 햇살보다 환하게 웃는 재환을.
떠들썩한 축제장을 나와 제천의 맛집을 검색했다. 많은 이가 극찬한 양푼 등갈비찜, 두꺼비 식당으로 향했다. 매운맛으로 2인분 주문했다. 매콤한 양념이 스민 고기는 손대면 사르르 뼈와 분리될 만큼 잘 익었다. 특히 등갈비 위에 수북이 올려진 새송이버섯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맛이 고기만큼 일품이었다.
재환과 경미는 일상으로 돌아와 종종 제천을 떠올렸다. 그리고 1년 뒤 봄, 재환은 더 능숙해진 운전 솜씨로 제천으로 향했다. 손잡고 벚꽃길을 걸었고 '이 매콤함은 오직 두꺼비식당뿐'이라며 매운 등갈비찜을 먹었다. 이듬해 역시 두 사람은 벚꽃이 흩날릴 무렵 제천을 찾아와 봄을 함께했다.
'내년 봄엔 부부가 되어서 제천에 오겠구나.' 경미는 프로포즈 반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경미야, 보고 싶어."
그해 11월, 울음 섞인 재환의 목소리는 경미를 흔들었다. 이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그녀였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다 소진해 헤어짐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둘을 갈라놓았기에 경미 역시 재환을 매정히 놓을 수 없었다.
경미는 잠긴 목소리로 재환의 차에 올라탔다. 재환의 눈 역시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제천으로 향하는 차 안은 예전의 수다 대신 무거운 침묵과 서늘한 어색함만 감돌았다. 그럼에도 재환은 습관처럼 경미의 손을 잡았다. 가을의 청풍호는 봄의 화사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온기 한 점 없이 황량했다.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되돌이표처럼 반복하면서도, 젖은 눈으로 사랑을 말하는 재환을 보며 경미는 생각했다. 회색 바람이 부는 제천을, 젖은 눈으로 자신을 담았던 재환의 마지막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뜨겁고 매콤했던 등갈비찜의 맛이 이제는 아릿한 통증으로 기억될 것임을 직감하며, 두 사람의 청풍명월은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