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할 때 튀어라 : 태안 박속밀국낙지탕

사과할 마음도, 새 밥을 내어줄 마음 한 톨 없는

by 경미로움

태안군청으로부터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꽃박람회 기간과 겹쳐 이틀정도 엄마도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그러하듯 2인분 이상 주문해야 하는 음식은 먹지 못하기에 엄마와 함께할 맛집 리스트를 따로 메모해 두었다.


*엄마와 함께 먹을 음식 : 게국지, 누룽지 돌짜장, 박속밀국낙지탕


엄마가 태안에 도착한 후 계획대로 꽃구경하고, 점심으로 게국지를 먹었다. 저녁엔 만리포에서 해수욕장을 거닐고 돌짜장까지 완료! 다음날엔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을 구경했다. 세찬 바닷바람은 5월임에도 불구하고 옷깃을 파고들었다. 갯벌 속으로 몸을 숨기는 꽃게처럼, 우리도 뜨끈한 국물 속으로 숨고 싶어졌다.


“엄마, 저녁 메뉴로 기가 막힌 걸 먹을 예정이야. 박속 밀국 낙지탕!”

“엥? 그게 뭐야?”

“바가지 만드는 박 알지? 그 박열매의 속을 넣은 맑은 낙지탕이래.”


나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잘 아는 양 자랑스럽게 브리핑했다.


“아이고, 오늘 낙지가 다 떨어져서 일찍 끝내는디 어째유”


영업 마감 중인지 식당 앞에 물을 챱챱 뿌리며 사장님은 무심히 슬픈 소식을 전했다.


“꽃지에서 식당까지 거의 한 시간 걸려서 왔는데... 이럴 수가...”


아쉬움과 좌절감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오다 보니까 치킨집 있던데 치킨 사서 숙소에서 먹자.”


엄마는 차선책을 제안했지만 기왕이면 태안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어라? 저 식당도 박속밀국낙지탕 파네. 역시 맛집 주변엔 비슷한 메뉴를 팔기 마련이지.”

“그러게. 손님 있는 걸 보면 저기는 아직 영업하나 봐.”


원조 맛집이 아니면 어떠하리. 박속이 들어가고, 낙지가 들어가면 비슷하지 않겠는가.

‘원조 맛집 옆에는 늘 대안이 있기 마련이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화근이었다.





사장님은 맨손으로 김치 한 포기를 들고 창고에서 나오며 물어왔다.


"낙지탕 드려?"

"네, 2인분 주세요."


엉덩이도 붙이기 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문하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게의 인상을 형용할 단어는 허름, 너저분, 끈적끈적, 어수선. 대체로 식당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왠지 낙지가 안 신선할 거 같은데?”


엄마가 소곤소곤 귓속말로 나가자는 의사를 비쳤다.


“조금 쎄하긴 한데... 시간 늦어서 숙소 근처 가면 식당들 문 닫을 거 같아. 그냥 먹고 가자.”


숙소까지 30분 이상 가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다음 날부터 혼자 여행해야 했다. 그래서 저녁으로 엄마와 함께 낙지탕을 먹고 싶었던 이유가 더 컸다. 사장님은 빨간 김칫국물을 뚝뚝 흘리며 주방에 들어가 곰삭은 김치를 서걱서걱 썰었다. 옆 테이블엔 중년의 커플이 식사하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밥을 한술 뜨더니 사장님께 큰 소리로 말했다. 마치 우리도 들으라는 듯.


"킁킁. 이거 밥이 상한 거 같은데요?"

"상하긴 뭘 상해요. 오늘 아침에 갓 한 밥인디!"


사과할 마음도, 새 밥을 내어줄 마음도 한 톨 없는 사장님의 발언. 우리 모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짐을 챙겼다.


"사장님, 저희 그냥 안 먹고 갈게요."

"아니, 왜유~ 불 올렸는디!"


후다닥 가게 밖으로 달아났다.


“불을 올리긴 뭘 올려. 아무것도 없는 거 다 봤는데. 참나.”

“맨손으로 김치 들고 나올 때부터 안 먹고 싶었어.”


엄마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유리 너머 식당 안에서 묵묵히 식사하는 중년 커플이 고맙게 느껴졌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면 꾸벅 절이라도 올렸을지 모른다. 결국 우린 차선책이었던 치킨을 사 들고 숙소로 향했다.




일주일의 태안살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조 박속밀국낙지탕 포장했슈. 저녁 먹지 말고 기다리셔~"


포장 용기 속에서 힘차게 꿈틀대는 낙지를 보며 엄마는 안도했다.


"그래, 낙지가 이래야지. 그 집에서 먹었으면 백퍼 탈났어."

"그 아저씨가 우리를 구한 귀인이야."


박속밀국.jpg


원조 박속밀국낙지탕의 맛은 깔끔, 시원, 조화로움 그 자체였다. 무를 넣은 국물과는 또 다른, 담백하고도 깊은 시원함이 일품이었다. 특히 국물 속에 잠긴 박속은 연하고 쫀득한 곤약 같은 식감을 자랑하며 입안에서 즐겁게 굴러다녔다. 신선한 낙지까지 곁들인 그 완벽한 한 그릇으로, 나의 태안 여행은 경미한 사고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경미한 미식 평점]
게국지 : ★★★☆☆
(맛있지만 예상 가능한 범주)

누룽지 돌짜장 : ★★★★☆
(식감의 변주가 훌륭함)

박속밀국낙지탕 : ★★★★★
(귀인이 구해준 천상의 담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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