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모습이나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고 고통을 받을 때 너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첫째,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자신과 남들에게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좋지 않게 비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너희의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그런 식으로 느끼느 게" 십중팔구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고 있다. 그것은 십중팔구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일 뿐이요, 자신은 "그보다는 더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쩔 수가 없다. 너희는 여전히 그런 식으로 느낀다.
이럴 때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다.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것.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건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기에. 너희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존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들의 느낌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겠는가?
남들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기되어야 할 첫번째 질문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나는 지금 어떤 존재이며',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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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혹 너희가 맨처음 느끼는 감정이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그 느낌을 그냥 갖고 있는 게 그런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 때가 많다. 그 첫 느낌들을 되고 싶지 않은 것들'로서 벗어던질(disown) 수 있는 것은 너희가 화가 났을 때와 짜증이 날 때, 혐오감이 일 때,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힐 때,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 따위를 갖고 있을(own)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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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들은 재앙의 씨앗들(과 모든 체험들)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걸 알기에 재난을 축복한다. 그리고 선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두번째 목표는 언제나 성장이다. 왜냐하면 충분한 자기실현을 경험하고 나면 그 이상이 되는 것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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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자신'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창조할 수 있으며, 사실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같은 대답을 가지고 나서지는 않는다. 똑같은 외부 체험이라 하더라도 하루는 참고 아끼고 친절하게 대하는 쪽을 택하고, 또 어떤 날에는 화내고 짜증내고 슬퍼하면서 대하는 쪽을 택한다.
선각자는 항상 똑같은 대답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가장 고귀한 선택이다.
이 면에서 선각자는 그 자리에서 당장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 제자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 대응하거나 반응할 때, 어떤 수준의 선택을 하는지만 보아도 그 사람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가장 고귀한 선택이란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낳는다.
이것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신학과 철학들이 중심으로 삼아온 질문이다. 진실로 이 질문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다른 질문들에 몰두하고 있는게 현실이니까 말이다. 어떤 것이 가장 고귀한 선택인가각 아니라, 어떤 것이 가장 이로운 선택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가장 적게 손해를 볼것인가라는 질문에.
손해 안보기나 최대한 이익이란 관점에서 삶을 살면, 삶의 참된 이익은 놓치고 만다. 그럴 기회를 놓고 그럴 가능성을 잃는다. 이런 식의 삶은 두려움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식의 삶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너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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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 외에 너희 영혼과 관련 있고, 의미 있고,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다른 질문은 없다.
이제 우리는 해석이라는 아주 미묘한 지점에 이르렀다.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이라는 이 원칙은 너무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 사람들이 삶을 원망하고 삶에 화를 내는 것도 그런 오해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너희는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남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려 하고, 그런 일을 하려 하고, 그런 것을 가지려 하는 데서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이 나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장 고귀한 선택이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 즉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심오한 영적 진리가 다 그렇듯이,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즉석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오해의 소지는 휠씬 줄어든다. 그리고 그 가장 고귀한 최고의 선택이 절대적인 것일 때 수수께끼는 풀리고 순환논법은 완결되며, 너희를 위한 최고의 선이 남들을 위해서도 최고의 선이 된다.
이런 진리를 이해하는 데만도 몇 생애가 걸릴 수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데는 훨씬더 많은 생애가 걸 수 있다. 이진리는 훨씬 위대한 진리, 즉 '너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곧 남들을 위해 하는 것이고, 남들을 위해 하는 일이 너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진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와 남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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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 한 그 사람은, 즉 쉽게 용서해주고, 연민을 나타내며, 문제 있는 행동을 계속 눈감아준 그 사람은 심지어 신에 대해서조차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불신한다. 설사 사랑이란 이름을 걸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신이라는 작자가 그처럼 끝없는 고통과 불쾌함과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신은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단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너희 자신도 포함시키라고 요구할 뿐이다.
신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우선시하라고 제안하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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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이냐를 판단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려는게 무엇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단계를 간과하고 넘어가곤 한다. 너희는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가? 네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Conversations with God- Book 1. by Neale Donald Wa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