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가 말했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알기에 더는 낳지 않는다.”
그리고 덧붙였다.
“멧돼지는 여우 냄새가 나면 새끼를 적게 낳는다.”
그 말은 출산율이나 정책 같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감각,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게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상 아래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내가 해주고 싶은 걸 못 해줄 것 같아서...”
“삶은 고통이라는 걸 알아버렸기에 더 낳지 않는다.”
“행복은 상대적인데, 이제 그 상대가 너무 가까이에 있다.”
어떤 이는 돈 때문이라 했고,
어떤 이는 비교와 박탈감, 삶의 허망함을 이야기했다.
그 모든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둘째를 망설이고 있다.
그건 불안도, 회피도, 체념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깊이 사랑했고, 너무 많이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를 키우며 나는 알게 됐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 깊이만큼 나 자신은 점점 투명해진다.
나는 부모로서의 삶을 기꺼이 통과했고,
그 안에서 충분히 소모되었으며,
때로는 조용히 고갈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만큼은 나를 위해 살아보고 싶다.
하고 싶은 일,
밀려난 생각들,
지연된 꿈.
사랑이 충분했기에,
이제는 내 몫의 생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은
사랑으로 나를 완전히 밀어내는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은 다르다.
누군가는 아이가 많을수록 더 깊은 보람을 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부모가 되며 비로소 자신을 완성했다고 말한다.
그 말들에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다를 뿐이다.
나는 하나로 충분했다.
나는 이미 한 생명을 진심으로 품었고,
그 경험만으로도 인생은 단단해졌다.
한때 루마니아에는
출산이 국가의 명령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태어났지만,
사랑받지 못한 채 고아원에 버려졌다.
그들은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 불린다.
그 이야기는 내게 하나의 물음을 남긴다.
“내가 진심으로 품을 수 없는 생명이라면,
그건 시작되어도 되는 일인가?”
나는 둘째를 망설이고 있다.
그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그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오랫동안 미뤄뒀다.
이제는,
조금 더 내게 집중해도 괜찮다고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