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은 땅을 흔들고, 죽음은 사회를 바꾼다

다시 살아가는 감각에 대하여

by 노경문

일본의 난카이 대지진이 15년 내 80% 확률로 발생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뉴스였지만, 이번엔 그 문장 앞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읽자마자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슴을 덮쳤다. 저런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땅 위에서 매일을 산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무섭고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낯선 두려움 앞에서 조용히 숨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곧 질문이 바뀌었다.

단순한 공포를 넘어서,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어떤 감정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가?’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자연의 파괴 앞에서 그들은 어떤 태도를 선택해왔는가. 반복된 죽음과 상실 속에서도 삶을 이어온 그들의 정신은 어떤 결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 질문이 내 안에서 천천히 감정을 바꾸어갔다.

놀람에서 경외로, 두려움에서 이해로.

우리는 자연재해에 익숙하지 않다. 나 역시 마흔을 앞두고 있지만, ‘지진’은 여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렇듯.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지진을 피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반복되는 대재해 속에서 일본인들이 선택해온 태도는 단지 방재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삶을 대하는 철학이고, 죽음을 곁에 둔 일상의 감각이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는 또 한 번 깊은 슬픔과 붕괴를 경험했다. 수만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집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울면서 다시 집을 지었다. 물이 휩쓸고 간 마을에 꽃을 심고, 아이들에게 지진을 기억하는 법을 가르쳤다.

방재 교육은 단순한 생존 훈련이 아니라 감정 교육이기도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받아들이는 훈련. 무너진 삶을 다시 짓는 태도.

그들의 언어에는 ‘무상(無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는 전제. 그 위에서 아름다움도, 관계도, 순간도 다시 빛난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아이들은 ‘살아남는 법’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마음’을 배우는 듯하다.

공포를 부정하지 않고 말하는 법. 상실을 기억하며 함께 우는 법.

그런 태도는 재난을 넘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감각처럼 느껴졌다.

도호쿠 대지진 직후, 한 일본 초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울어도 괜찮아. 무서운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함께 있어.”

공포와 위로가 동시에 담긴 말이었다. 무너진 건 건물뿐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을 다시 세우는 일은 훈련이 아니라 말과 손길, 그리고 함께 흘리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읽으며, 문득 그 해 한국 사회가 떠올랐다. 뉴스는 연일 방사능 공포에 집중했고, 생선 수입 금지와 바닷물 오염에 대한 우려가 온 나라를 덮었다.

정작 수만 명이 죽고 삶이 쓸려나간 이웃 나라의 고통은 배경처럼 흐릿하게 지나갔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우리는 공포에는 민감했지만 연민에는 둔감했던 건 아닐까. 그 사실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죽음을 다시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을 다시 배우는 일이기 때문 아닐까.

죽음을 감추고 통제하려는 사회는

아이를 낳기 두렵고, 실패하기 부끄럽고, 오늘을 버티기 힘들어진다.

청년은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노인은 고독사하며, 매일 40명 가까운 이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만, 정작 죽음을 이야기할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반면,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문화는 오늘을 다르게 만든다.

지금 이 말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감각. 지금 이 만남이 단 한 번뿐일 수도 있다는 마음.

한국은 상대적으로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가 적은 나라다. 지리적 안정성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죽음이 멀리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안전에 둔감하고, 사고를 외면하거나 방치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많은 참사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였다.

이태원 참사, 세월호,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참사처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면, 곁에 있는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인재를 막을 수 있는 책임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이 반복된 재난 속에서도 지켜온 태도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오늘에 집중하는 태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선택하는 훈련.

이건 출산율이나 경제 문제 같은 구조적 위기 앞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숫자와 제도 이전에 필요한 건, 삶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다.

“죽음을 두려워하되, 그 너머에 있는 삶의 감각을 잊지 말라.”

이 말은 일본 선불교 철학자 다이세츠 스즈키가 평생에 걸쳐 강조해온 태도, 즉 “삶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마주하는 감각”과도 닿아 있다.

공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지금, 가장 절실히 회복해야 할 태도일지도 모른다.

지진은 땅을 흔들지만, 죽음은 사람의 마음과 사회의 토대를 흔든다. 그런데 그 흔들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진동은 우리가 잊고 있던 감각을 되살린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그래서 오늘을 더 깊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 기사를 통해 지진을 처음 생각했고, 곧 죽음을 떠올렸고, 결국 삶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불안한 세계에서 가장 강한 태도는, 오늘이라는 순간에 충실해지는 것 아닐까. 마치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래서 오늘은 아이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해주고,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지진이 올지, 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 마음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지금 이 말, 지금 이 눈빛, 지금 이 손길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내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그리고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은 다짐 하나가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화,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