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를 깨는 법 2

혼란스러운 세상 속, 내 중심을 지키는 질문들

by 노경문

영상을 넘기다 눈이 잠시 멈췄다.
익숙한 구도. 누군가는 규칙을 어겼고, 누군가는 그것을 참지 못해 나섰다. 댓글창은 이미 뜨거웠다. “사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경찰은 역시 무능하다”. 나는 그중 하나에 무심코 ‘좋아요’를 눌렀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넘기기엔, 왜인지 너무 시원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늘 정의를 가장한 감정을 건넨다. 빠르고, 단순하고, 중독성이 강하다. 맥락은 잘려 나가고, 분노는 농축된다. 영상은 언제나 우리 편에 서 있다. 그 덕분에 안도한다. 아직 세상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고.

최근 논란이 된 유튜버와 여경의 대치 영상, 장애인 주차구역을 악용한 이들을 색출하여 ‘참교육’하는 콘텐츠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시스템이 하지 못한 일을 개인이 대신해주는 장면은 오래 쌓인 무력감을 잠시 잊게 만든다. 나는 그 시원함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끝에서 읽게 된 박재영 광진경찰서장의 글은,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 글은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가 빌런이라 불렀던 사람의 곁에 있던 장애인 가족, 현장에서 절차를 지키며 대응하던 젊은 경찰들, 그리고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무능’이라는 낙인. 영상 속에서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던 얼굴들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처럼 보이도록 편집된 장면이었음을.

조회수가 법이 되는 세계에서 갈등은 수익이 된다. 플랫폼은 시민을 상정하지 않는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소비자만을 전제한다. 반면 법과 제도는 느리다. 절차를 밟고, 인권을 고려하며, 가능한 한 많은 변수를 끌어안는다. 답답하고 고구마다. 이 속도 차이 앞에서 판단은 자주 무너진다.

30초짜리 영상은 맥락을 지운다. 그 빈자리에 상상이 들어선다. 경찰은 무능하고, 유튜버는 유능하다는 단순한 구도. 정보는 많아졌지만, 사고는 오히려 짧아진다. 정의는 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이 현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돈을 벌기 위해 나쁜 사람을 잡는 게 뭐가 문제냐고. 결과적으로 사회가 나아지지 않느냐고. 아담 스미스의 빵집 주인의 이기심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이기심은 언제나 책임의 경계 안에 있었다. 법과 제도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이기심은 사회적 효율로 전환된다. 책임을 지지 않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책임 없는 사적 제재가 일상이 된 사회는 토머스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에 가깝다. 각자가 자신의 기준으로 칼을 들 때, 질서는 정의가 아니라 공포로 유지된다.

우리는 언제부터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의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사이다를 마시는 동안, 국가에 위임했던 안전과 신뢰를 조금씩 되가져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인식하기도 전에, 또 다른 영상을 넘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콘텐츠에 잠시 매료되었다. 이유를 돌이켜보면, 매일 마주하는 비즈니스 현장의 냉소와 닿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며 점주들에게 늘 말해왔다. 결과를 약속하지 않겠다고. 그 말이 차갑게 들린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고백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성실하지 않다. 본질보다 비본질에 집착하며 자신을 소모한다. 그런 장면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마음에 냉소가 쌓인다. 참교육 영상 속 응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도, 어쩌면 그 냉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응징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잠시 안도했다.
대신 누군가가 나서주었다는 사실에.
하지만 냉소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그저 감정을 소비할 뿐이다.

이 혼란을 잠재울 방법은 제재도 검열도 아니다. 결국 판단의 밀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질문에 기대를 건다. 하브루타라는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멈춰 서서, 당연하다는 듯 흘려보내려는 생각을 붙잡아 다시 묻는 태도다.

나는 마음속에 질문 하나를 더 앉힌다. 마주 앉은 사람처럼,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상대를 앞에 두고.

이 영상을 만든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수익 그래프의 상승만큼, 책임의 무게도 함께 감당하고 있는가.
이 장면은 시스템의 구멍을 메우고 있는가, 아니면 분노를 자극해 다음 영상을 위한 연료를 쌓고 있는가.
내가 느끼는 이 시원함은, 누군가의 권리와 존엄이 잘려 나간 자리에 남은 감각은 아닌가.

질문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쉽게 합의하지 않을 뿐이다.

완벽한 답은 필요 없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사고는 느려지고 감정은 멈춘다. 그 짧은 틈이 알고리즘과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매트릭스는 그렇게 조금씩 금이 간다.

이 글을 쓰는 가장 개인적인 이유는 아들 승원 때문이다. 너는 요즘 넘버블록스를 보며 세상을 숫자로 이해하기 시작했지.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는 세계. 하지만 네가 살아갈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화려한 영상과, 더 정교한 정의들로 가득할 것이다.

아빠는 네가 강한 아이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대신 멈춰 설 줄 아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때,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는 사람. 그 질문이 언제나 너를 옳은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디에 서 있는지는
스스로 알게 해 줄 것이다.

그 정도면,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엔 충분하다.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