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슈퍼볼 하프타임쇼, 배드 버니의 공연을 보며 생각했다.
각자의 정체성이 또렷하게 병치된 무대.
동화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이는 장면들.
나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법은 같아야지.”
법치주의는 단단해 보인다.
감정보다 위에 있고,
문화보다 중립적이며,
갈등을 정리하는 마지막 기준처럼 보인다.
나는 그 말을 오래 믿어왔다.
얼마 전 우연히 지났던 수원역 골목에서 느꼈던 짧은 불안도
결국 같은 문장으로 정리하려 했다.
“그래도 질서는 유지돼야 한다.”
“법은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법은 정말 모두에게 같은 거리에서 작동하는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신고할 시간도, 변호사를 찾을 여유도,
소송을 감당할 자원도 없는 사람들.
반대로 법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법률 자문을 받을 수 있고,
계약서를 해석할 수 있고,
시간을 들여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
법은 형식적으로 평등하다.
그러나 법에 접근하는 능력은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법에 가까워질수록
가난한 사람보다 가진 사람이 유리해진다.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나는 무인매장을 운영한다.
절도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마음먹으면 CCTV를 확보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법의 절차를 끝까지 밟을 수 있다.
나는 그 권리를 갖고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손해액을 계산해 보고,
시간과 에너지를 저울질한 뒤
그냥 넘긴다.
이 선택은 관대함일까.
아니면 계산일까.
사실 나는 안다.
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법이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감당 가능한 손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선택권을 가진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법은 나에게 무엇인가.
최후의 수단.
보험.
필요하면 꺼낼 수 있는 장치.
그러나 누군가에게 법은
마지막 희망이 아니라
처음부터 닿기 어려운 구조일 수도 있다.
그 차이를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법은 중립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존은 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공존은 자원의 문제다.
일자리.
교육.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법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공존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선택권을 갖는지의 문제다.
나는 법을 신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이 기존의 소유 구조를 안정시키는 데
더 능숙하다는 사실도 안다.
법은 폭력을 줄인다.
하지만 이미 가진 것을 지키는 데에도 탁월하다.
나는 그 안정 안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중심이 이동하는 순간
나는 질서를 말한다.
법을 말한다.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내가 가진 평균적 우위를 지키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지 않은가.
책임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법의 구조가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 구조가 나에게 조금 더 유리하다는 것도 안다면,
나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나는 단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법의 한계를 인식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가.
공존을 말하면서
내가 실제로 감수할 수 있는 손실은 어디까지인가.
세금.
정책 변화.
경쟁의 심화.
평균의 하락.
나는 어디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디에서
다시 “질서”라는 말을 꺼내 들 것인가.
슈퍼볼 무대에서 느꼈던 이질감은
어쩌면 문화의 충돌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존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비용이 내 삶의 계산서에 찍히는 순간
태도를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너지는 것이 공동체인지,
아니면 내가 서 있던 중심인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이제 정의는 나에게 도덕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계산한다.
세금 인상.
경쟁 심화.
정책 변화.
내 자산의 변동 폭.
나는 정의를 지지하면서도
그 비용이 내 통장에 찍히는 순간
손익을 따진다.
나는 불공정을 비난하지만
그 구조가 나에게 이익을 남길 때는
침묵을 선택한다.
나는 공동체의 붕괴를 걱정한다고 말하면서
실은 나의 하락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정의는 신념이 아니라
보험처럼 보관된다.
필요할 때 꺼내 들고,
손해가 커지면 다시 접어 넣는다.
나는 파국을 막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 몫의 손실을 통제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나는 늘 나의 평균을 먼저 지킨다.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나는 정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불편해지지 않는 정의를 원하는가.
그 차이를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숫자를 확인한다.
그리고 계산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정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