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느끼고, 나는 묻는다

by 노경문

친구가 시험에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어떤 사람은 조용히 “속상했겠다”고 말하며 토닥이고, 어떤 사람은 “무슨 시험이었는데?”라고 묻는다.

어떤이는 그 차이를 공감 능력으로 판단하고,
또 어떤이는 무례함의 유무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어떤이는 감정에 빠져 말이 흐려진다고 느끼고,
또 다른 이는 사실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걸 답답해한다.

나는 이제 그걸 조금 다르게 보려한다.

살다 보면 감정부터 살피는 사람이 있고, 상황부터 파악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
F와 T.
감성을 먼저 꺼내는 사람과 이성을 먼저 작동시키는 사람.
이 둘의 간극은 생각보다 훨씬 깊다.

F는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믿고,
T는 슬픈 사람이 둘이 되는 거라고 말한다.
F는 “다음엔 꼭 붙을 거야”라며 위로부터 건네고,
T는 “몇 점 차이였어?”라고 묻는다.

F는 그런 질문이 차갑고 무심하게 느껴지고,
T는 상황을 알아야 위로나 조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애초에 다르게 설계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그 차이의 뿌리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
눈앞에 맹수가 나타났을 때, 인간은 먼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 순간 필요한 건 빠른 판단과 결단이었다.
“왜 무서운지”보다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망설이지 않고 결단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을 돌파하는 사람이 살아남았다.
그때는 따뜻한 말보다 빠른 발이 필요했고, 공감보다는 냉정함이 중요했다.

그 시절 남자들 대부분은 F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미뤄야 하고, 공감은 사치였다.
살아남는 자가 곧 정답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불을 피우고, 사냥한 음식을 나누고, 다친 동료를 돌보며 살아야 했기에,
공감과 위로, 정서적 유대감은 또 다른 방식의 생존 전략이 되었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
눈물의 이유를 묻기 전에 함께 앉아주는 사람,
그런 존재가 많아질수록 공동체는 단단해졌고,
그 마음은 결국 다음 세대까지 전해졌다.

이성과 감성은 모두 생존의 유산이었다.
이성은 위협을 피하기 위한,
감성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본능이었다.

지금은,
같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도,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자라온 가정, 부모의 말투,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회로를 만든다.

감정을 꾹 눌러야 했던 아이는 감정에 거리 두는 법부터 배운다.
반대로 감정을 나누지 못한 채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아이는 타인의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는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왜 우는지’가 먼저 궁금하고,
누군가는 이유보다 ‘얼마나 아플지’가 먼저 느껴진다.

그렇게 각자 다른 환경속에서 다르게 길러졌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충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위로받고 싶어서 속마음을 꺼냈는데, 상대는 해결책부터 내놓는다.
서로는 각자의 언어로 진심을 전했지만, 상대는 오해의 언어로 받는다.
그 간극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다.

문제는 이 차이가 개인을 넘어,
사회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성과와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는 이성을 강요하고, 감정을 사치로 만든다.
반대로, 감정이 끝없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마음이 먼저 지쳐간다.

이성만 남은 사회는 차가워지고,
감정만 넘치는 사회는 스스로를 태운다.

우리는 그 두 끝단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부모가 된 사람으로서 아이에게 어떤 반응을 가르쳐야 할까.

감정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도,
세상 앞에서는 냉정할 줄도 알았으면 한다.

감정과 이성,
공감과 해석.
모두를 동시에 말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더 멀리 가는 세상.

나는 내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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