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결국, 누가 내 이익을 더 잘 대변해줄 것인가의 문제 아니야?”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쟁을 비판하는 기사에 어떤이가 남긴 댓글이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 말은 놀랄 만큼 직설적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잔인하리만치 솔직했다.
한편으로는 깨달음처럼 다가왔고, 또 한편으로는 섬뜩한 냉소처럼 느껴졌다.
정치는 결국 이기심인가?
만약 그 말이 옳다면,
사람들은 왜 여전히 원칙과 신념, 정의라는 말을 곱씹는가.
왜 어떤 정치인은 표를 잃더라도 옳은 일을 선택하려 애쓰고,
왜 누군가는 아무리 가난해도 불공정한 지원은 거부하며 고개를 돌리는가.
나는 이 딜레마의 한가운데에서 곱씹어 생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디어는 매일같이 이를 비판한다. 미국 내 소비자 부담이 늘고, 주식시장은 요동치고, 글로벌 기업은 불확실성에 떤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것들을 거의 100% 이행 중이다. 그를 찍은 유권자의 절반은,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견하고도 선택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드문 정치인의 모습이다.
그는 말했듯이, 버티라 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고, 세계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과정 속에서 희생되는 국민도 있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불편 뒤에 더 큰 몫이 기다린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정치일까?
나는 한국을 떠올렸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복지를 말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줬다. 그러나 정책은 즉흥적이었고, 신뢰는 조국 사태로 무너졌다.
탈원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대규모 복지 등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긍정적 시도였지만,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부동산 실패와 노동시장 왜곡은 중산층과 청년층의 반감을 키웠다.
윤석열 정부는 법치와 공정을 말하지만, 현실은 반감의 정치가 더 커 보인다. 감세, 규제 완화는 재계의 신뢰를 얻었지만, 극단적 반문 프레임과 이대남 중심의 메시지, 전문성을 무시하는 행정집행은 약자 담론을 소외시켰다.
두 정부 모두 시대의 요구를 말했지만, 감정의 언어로 설득하려 했다.
그래서 공적 담론은 점점 감정의 싸움이 되었고, 그 결과 시민은 점점 냉소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왜 신뢰를 잃었을까?
공적 결정은 때로 말을 지키지 못하고, 공약은 종이 위에서 사라진다.
그 반복은 시민에게 냉소를 학습시키고, 결국 감정의 투표로 이어지게 한다.
냉소는 사유를 멈추게 하고, 공론장을 불신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결국 유권자는 감정적으로 투표하고, 정치는 더 자극적인 서사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의사결정이란 원래 이런가요?”
그 대답을 위해, 시스템을 고민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선택하지 않도록, 우리가 이기심을 넘어서도록 도와주는 제도는 없을까?
공론화 제도는 정책을 도입하기 전, 시민들이 숙의하고 토론하며 결정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이다. 탈원전, 낙태, 난민 수용 같은 감정적 이슈에서 공론화는 사실의 기반을 만들고, 극단을 완화한다. 프랑스·덴마크는 이미 시민과 함께 답을 찾아가고 있다.
정당 정책 평가 시스템은 정당의 공약 이행률, 회계 투명성, 정책 실효성을 전문기관이 수치화하여 공개하는 제도다. 이제는 말보다 실적이 힘을 가져야 한다. 대만은 이미 이를 도입했다. 정당의 정책 신용도는 유권자의 신뢰로 이어진다.
정치정보 플랫폼의 개선이 필요하다. 뉴스가 아닌, 데이터를 제공하는 플랫폼. 공약이 나에게 미칠 재정 영향, 사회적 약자에게 주는 영향, 정책 지속가능성을 정량화해 보여주는 구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유튜브 대신, 정책을 추천하는 시스템 속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기적인 선택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나 그 이기심이 분노가 아니라 이해에서 나올 때, 공공 결정은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다.
나는 그 시작이, 이해를 가능케 하는 정보, 그리고 감정을 지연시키는 제도라고 믿는다.
공적 판단은 민심의 거울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감정이 아닌 이성의 구조로 자신을 세워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상을 믿는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이 아니라, 구상을 통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에 투표하는 대신, 공동의 방향에 뜻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이란, 단지 정책의 선택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가는 우리 자신의 선택지를 세우는 일이다.
그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