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인사, 예의, 친절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는 정말 진심으로 연결되고 있는 걸까?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 사람을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도, 웃지 않았다.
버튼만 눌렀고, 좁은 공간은 적막히 닫혔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장면이 겹쳐졌다.
그렇게 자랐다.
“웃어른이 계시면 인사해야지.”
고개를 푹 숙였다.
때론 인사가 부족하다고 혼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또렷하게, 더 밝게, 때론 억지로라도 웃었다.
웃어야만 했다.
나를 지키고, 인정받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마음속엔 늘 질문이 맴돌았다.
왜 나는 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가.
그는 나를 아는가.
이 인사는 정말 내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걸까.
그건 데카르트를 몰랐던 시절,
내가 처음 느낀 회의였다.
우연히 데카르트를 만났다.
그는 모든 감각과 관계, 존재를 의심한 끝에
단 하나의 문장을 남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타인의 감정도, 세계의 실재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한 건 단 하나.
지금 의심하고 있는 ‘나’뿐이다.
그 철학은 내 안의 감각과 겹쳐졌다.
사람은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다.
마음은 보이지 않고,
우리가 나누는 말들은 대부분 추측일 뿐이다.
우정도, 존경도, 사랑도.
결국은 믿음이라는 허공에 세운 다리다.
그 다리는 흔들린다.
그리고 종종 무너진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항상 거리를 두었고,
그 안에서 나를 보호하곤 했다.
오늘 부모님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아빠는 말했다.
“예전엔 별 생각 없었는데,
굳이 인사해야 하나 싶어. 안 하고 싶을 수도 있지.”
그 말이 이상하게 편안하게 들렸다.
엄마는 말했다.
“난 그래도 그냥 해요. 애들 보면 더 다정하게 해줘요.
상대방이 날 기억하든 말든, 난 그게 좋아요.”
그 말이 또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릴 적의 나를 다시 떠올렸다.
억지 웃음과 허둥지둥 숙인 고개.
진심 없는 인사는 나를 지켜주지 못했고,
진심 있는 인사조차
무심하게 지나가곤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그 사람과의 거리는 고작 70cm였지만,
그날 나는, 세상과 수만 킬로미터쯤 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반갑다.
어색하지만,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존재를 확인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오늘도 망설인다.
인사할까, 말까.
마음을 열까, 말까.
다가갈까, 그대로 있을까.
어제 한 영상을 봤다.
"불교에선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볼까?"
한 비구니 스님이 나직이 말했다.
불교의 계율을 집대성한 율장에는 성에 대한 제약이 있지만,
더 깊은 맥락에서 보면,
헤아릴 수 없는 윤회의 시간 속에
무엇이 안 되어봤겠느냐고.
당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끌린다면,
그건 이 생에서 그 사람이 동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 생에서 부모였을 수도, 연인이었을 수도,
혹은 원수였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감정의 흐름은
성별이나 상황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사람은 나를 모르고, 나도 그를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만났다.
아무 맥락 없이 이어진 인연은 없다.”
관계는 결국 이해가 아니라 머무름일지도 모른다.
다 알지 못해도 곁에 있는 것.
이해되지 않아도 다정하게 존재하는 것.
그건 논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결국 확실한 건 단 하나.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다.
그건 진짜다.
그 어떤 관계보다, 그 어떤 인정보다.
관계는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선택한 머무름으로 증명된다.
인사는 그 시작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망설이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감정들까지도 나의 일부라면,
그걸 인식하고 살아내는 내가
결국 나와 관계 맺고 있다는 뜻 아닐까.
오늘도 나는 나를 의심하면서,
그러면서 조금씩 나를 사랑한다.
외로움보다는 거짓이 싫었던 아이가,
이제는 외로움 속에서 진짜를 찾으려는 어른이 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