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트위터에서 한 밈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어? 나만큼 하는 사람이 트럭 500대.
중국어? 잘해도 한국어 잘하는 중국인이 싸다.
스페인어? 항상 뜬다지만 학원은 망했다.
노어와 아랍어? 그냥… 살려줘.
영어? 이 바닥에 영어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처음엔 웃겼다.
그러다 이내 씁쓸했다.
이 문장들은 농담처럼 보이지만,
외국어라는 ‘사다리’를 오르려 애써온 세대의 체념과 회고가 담겨 있었다.
밈 아래엔 이런 댓글도 달려 있었다.
"외국어 전공하고 현업에 있지만, 번역은 이미 끝났고, 통역도 일이 없다.
내가 이걸 왜 배웠나 싶다. 이젠 다 기계가 해준다."
말끝은 가벼웠지만, 현실은 무거웠다.
외국어는 여전히 사교육 시장에서 고가치 상품처럼 유통되고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시장은 수요가 아니라,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현실을 가장 절실하게 겪어본 30~40대 세대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그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고 있다.
우리는 왜, 스스로 겪은 비효율과 환상을
더 빠르고 더 정교한 방식으로 아이에게 되돌려주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불안 회피다.
영어유치원, 레벨 테스트, 원어민 수업은
‘무언가 하고 있다’는 착각과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이 루틴은 즉시성과 비교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결국 우리는 아이의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이 비정상적인 흐름에 대해 연세대병원 소아정신과장 천근아 교수는
“대치동에 소아정신과가 가장 많다. 단언컨대, 애는 잘못된다.”
라고 유튜브 영상에서 말했다.
두 번째 이유는 구조를 개인 책임으로 전가하는 문화다.
“영어가 쓸모없다”는 인식은 늘고 있지만,
“내가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좀 더 제대로 했더라면…” 같은 후회가 그 인식을 지운다.
문제의 본질은 시스템에 있는데,
원인은 자꾸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 결과, 같은 틀 안에서
시기와 강도만 바꿔가며 되돌려 시작하는 선택을 반복한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 자체가 바뀌었다.
AI 번역기는 이미 실시간 회화 수준에 도달했고,
구글, DeepL, ChatGPT 기반 음성 인터페이스는
3~5년 내 비즈니스 회의, 국제 전화, 화상 면접까지
동시 통역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계는 말을 대신할 수 있지만,
말의 방향과 맥락은 인간만이 설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어는
학교 안에서 가장 손쉽게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과목으로 남아 있다.
어휘, 문법, 독해, 듣기, 말하기.
이 다섯 영역은 정량화와 서열화에 최적화되어 있다.
수학처럼 정답이 명확하고,
국어처럼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는 입시와 채용에서 ‘선별의 도구’로 작동한다.
현실에서는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누군가를 탈락시킬’ 기준으로 영어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실력이 아니라, 선발의 편의성이 영어를 붙잡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게 영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의 평가 시스템 전체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틀이,
결국 사람을 규정해버리는 구조로 굳어졌다.
암기 중심의 정답형 시험은 실제 언어 능력과는 거리가 멀고,
‘문제를 잘 푸는 사람’만이 기회를 얻는다.
그 결과는 익숙하다.
운전면허는 땄지만 운전을 못하는 사람,
자격증은 있지만 실무에선 무능한 사람을 꾸준히 양산한다.
시험은 자격을 증명하는 도구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선별 절차로 기능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더 빠른 선행이나 더 높은 점수가 아니라,
제도 자체의 전면적 재설계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승원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길 바라는 마음 너머에는
혹시 내가 과거에 놓친 것을 대신 이뤄주길 바라는 감정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순환일 뿐이다.
나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대리 시도.
나는 이제 다르게 말하고 싶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외국어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라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아는 아이.
그것을 자신 있게 구조화하고 표현할 수 있는 아이.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의도와 감정을 품은 사람.
승원이에게 외국어는 태권도처럼,
배워도 좋고, 안 배워도 좋은 교양이 되길 바란다.
그 언어를 통해
‘무엇을 말할지’를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기계는 언어를 옮길 수는 있어도,
방향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번역은 끝났고,
이제는 무엇을 향해 걸어갈지 그리는 일이 남았다.
말은 단지 그 경로를 잇는 표시일 뿐이다.
지도를 그리는 건 인간의 몫이다.
외국어는 더 이상 사다리가 아니다.
사다리는 이미 낡았고,
지도는 바뀌었는데 경로는 여전히 옛 좌표를 따라가고 있다.
이제는 각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말들로
스스로의 길을 그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