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세상도, 나 자신도 아직 서툴던 시절.
그때, 그녀를 만났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초행길을 걷듯 사랑을 배워갔다.
하지만 뜨거웠던 그 시절만으로
완성되진 않았다.
스물이 넘어,
한 번 서로를 놓았다.
각자의 길을 걸었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보며,
떨어진 채 살아보기도 했다.
그 시간은 길었다.
하루가 유난히 길었고,
잊지 못하는 날들이 더 길었다.
끝내, 다시 돌아섰다.
함께한 세월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 끝에도
가장 편하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서로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선택했다.
그 선택이
지금의 삶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동안 같은 길을 걸었지만,
사랑을 말하는 방식은 달랐다.
나는 말을 아끼진 않지만,
감정을 눌러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말이 많진 않지만,
느낀 만큼 표현하고 사소한 온기에도 기대고 싶어했다.
더 가까워지려 애썼던 날도 있었고,
이해하지 못한 채
냉랭한 공기 속에 멈췄던 날도 있었다.
며칠전, 매장일로 정신없던 하루.
그녀가 부탁한 작은 과자를
나는 깜빡했다.
차에 올라탄 순간.
“과자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녀의 굳어가는 표정을 봤다.
깜빡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쌓인 실망을 터뜨리는 방아쇠가 됐다.
“왜 매번 그래?”
나는 억울했다.
오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 하나로 모든 게 무시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날이 섰다.
“그렇게 말할 거면 앞으로 절대 부탁하지 마.”
그날의 차 안은, 말없이 식은 냉동고가 되었다.
사소한 일이
금처럼 남기도 한다.
내게는 흘러가는 실수였지만,
그녀에겐 사랑이 식고 있는 징후였다.
냉탕 같은 시간이었다.
차가운 공기처럼
자리를 찾지 못한 마음들이
숨막히게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내 등을 돌리진 않았다.
지치고, 다투고, 오해했던 날들 속에서도
어디선가 다시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그게 사랑이다.
늘 뜨겁게만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식고, 끓고, 다시 식어도
결국 다시 손을 내미는 것.
승원이가 태어난 후,
삶엔 또 다른 열탕이 찾아왔다.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아이.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그 말 한마디엔 간절함과 기쁨이 다 담겨있다.
잠을 설친 밤도 있었고,
울음에 지친 새벽도 있었지만,
서로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 모든 순간이 감사였고, 축복이었다.
그 존재는 기적처럼 다가왔고,
그 자체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변하는 걸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엔 쉽게 웃고, 자주 표현하고, 사소한 일에도 설렜다.
지금은,
그때보다 조용하고, 덜 표현하고,
가끔은 또 지나치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변한 건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처음엔 뜨거운 감정이 이끌었고,
지금은 선택과 책임이 이끈다.
쉽게 드러나지 않아도,
쉽게 식지 않는 마음.
그래서 사랑은 변한 적이 없었다는 걸로 결론냈다.
다만,
더 오래 가는 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라는 걸.
나는 지금도 사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버스정류장의 그날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익숙한 방식으로.
하지만,
아주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이제는,
기대하고 서운해하는 사랑이 아니라,
견디고 존중하는 사랑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어린 연인의 설렘을 지나,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으로,
서로의 속도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앞으로도,
냉탕 같은 날에도,
열탕 같은 순간에도,
식어가는 하루에도,
끓어오르는 밤에도,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차갑고 뜨거웠던 모든 시간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사랑이라 부르면서.
그렇게,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곁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