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직전 눈을 떴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헤드라인을 넘겼다.
“신종 독감 유행…”, “코로나 변이 확산…” 너무 익숙한 문장들이라 놀라지도 않았다. 헤드라인은 끝없이 이어졌고,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 정보를 ‘읽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걸까.
정보는 넘쳐나는데, 생각은 점점 줄어든다.
어떤 말이 ‘과학의 이름’으로, 어떤 정책이 ‘정부의 권위’로 포장되면 그들은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보가 왜 만들어졌고,
어떤 흐름 속에 나왔는지를 되짚어보는 습관 없이 ‘정보의 소비자’를 자처하다가
어느새 누군가의 계획 속에서 움직이는 ‘의도의 마리오네트’가 되어버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가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끝까지 질문하는 힘이다.
감기와 독감은 모두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다르다.
감기는 흔한 병. 독감은 무서운 병. 누군가는 이 두 질환을 기온 차이만큼이나 다르게 여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절대적인 걸까?
의학적으로 보면
독감은 A형·B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해 발생하고, 고열과 근육통, 극심한 피로감이 동반된다고 한다.
반면 감기는 리노바이러스나 코로나바이러스 등 여러 원인에 의해 생기며, 대개 가볍게 지나간다.
하지만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누구는 이틀 만에 회복하고, 누구는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한다.
기저질환, 면역력, 연령, 환경... 그 모든 조건에 따라 질병의 경중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독감과 감기의 경계는 단지 바이러스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바이러스를 어떻게 '부르느냐'의 문제는 아닐까.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20년의 코로나19. 모두 바이러스였다.
하지만 질병은 바이러스 하나로 정의되지 않았다.
사회가 공포를 얹고, 언론이 위기를 키우고, 정부가 질서를 덧붙이며 그 바이러스는 '사건'이 되었다.
그들은 질병을 과학적으로 구분한다고 믿지만, 그 이름이 붙는 순간,
정책은 바뀌고, 통제 방식은 일상으로 스며든다.
같은 바이러스라도 사회적 파장이 크면 그 이름이 바뀌고, 대응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어떤 힘에 의해 질병의 이름이 바뀌는가.
그 기준은 과연 객관적인가?
WHO, CDC, 질병관리청 같은 기관들은 수치와 보고서를 통해 감염병을 정의하고 등급을 나눈다.
하지만 이 수치들은 모두 해석의 구조물 위에 놓여 있다.
검사를 많이 하면, 확진자는 늘어난다.
어떤 연령대를 포함하느냐에 따라 치명률은 달라진다.
전염 속도는 보도 방식에 따라 ‘급증’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병상 운영 정책 하나로도 위기 체감도는 바뀐다.
코로나19 초기, PCR 검사의 급격한 확대는 단순한 방역 조치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인식을 재편하는 전환점이었다.
‘위기’라는 단어는 확진자 수보다 먼저 도착했고, 정책은 숫자를 앞세워 정당화되었다.
통계는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설득의 언어였다.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위험도 안전이 되고, 안전도 공포가 되었다.
코로나19는 단지 전염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자산이었고, 경제적 파급력이 있었으며, 통제의 명분이 되었다.
정부는 비상권한을 통해 통제력을 강화했고, 제약회사는 전례 없는 속도로 백신을 출시했다. 방역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반면, 여행업·자영업·문화산업은 무너졌다.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고, 고립과 우울은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비판하는 사람은 '비이성적'이라 낙인찍혔다.
이때,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질문하는 권리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악은 종종 생각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코로나 시기, 많은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했고
의심을 이기적인 행위로 몰았으며
사회의 압도적인 흐름에 순응했다.
그 결과, 옳음이 아니라 다수의 선택이 기준이 되었고
과학은 신념처럼 소비되었으며
공감은 때때로 폭력이 되었다.
역사는 반복해서 경고해왔다.
나치 독일은 국민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불임과 안락사를 '의학적 처치'로 포장했고, 스탈린 체제는 반대자를 정신병자로 몰아 수용소에 가뒀다.
중국의 제로코로나는 확진자 한 명으로 도시 전체를 봉쇄했고, 아이가 치료받지 못한 채 숨지는 일조차 '공공 안전'이라는 말로 덮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소수의 고통은 '필요한 희생'으로 정당화된다.
진짜 위험은 잘못된 정책이 아니다. 그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서 법과 제도는 다수의 목소리를 따르기보다, 언제나 소수의 권리와 이탈자의 의견을 섬세하게 지켜야 한다.
사회가 한 방향으로 쏠릴수록, 그 반대편에서 밀려난 이들의 권리는 더더욱 귀 기울여 단단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 존엄의 최후의 보루다.
질병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하지만 그 질병이 어떤 이름을 갖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독감'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책이 바뀌고, 권리가 줄고, 산업이 무너진다.
이제는 더 이상, 정보의 양만으로 안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에겐 정보보다, 그 정보의 맥락을 해석할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이건 왜 지금, 이 방식으로 말해지는가?"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난다.
그렇게 다시, 각자는 누군가의 기준 안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된다.
어쩌면, 질문하는 태도야말로
정치적 극단과 혐오를 녹이는 가장 안전하고도 강력한 계몽이다.
질문은 혐오를 멈추게 하고, 생각은 우리를 다시 인간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