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운동은 나의 취미이자, 삶의 축이다.
흥미로운 건 이 둘 모두 결국 '나'를 위해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스며든다는 점이다.
글은 나를 위한 기록이지만,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고,
몸은 나를 위한 단련이지만, 누군가 봐주길 원한다.
나는 분명히 나를 위해 썼지만, 결국 너를 향해 써버렸다.
그 감정은 단순한 허영이라기보다, 인간 본성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은 철학자 헤겔의 말처럼 인류 문명의 시작이자, 정신의학자 아들러가 말한 모든 인간 행동의 핵심 동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인정은 늘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공들여도 돌아오지 않을 수 있고, 어떤 날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
인정에 기대어 만든 행동은,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 허망해진다. 바로 그것이 위험이다.
나는 한동안 스스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그건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어릴 적부터 스무 살 초반까지, 나는 무시당하지 않으려 애썼다.
져선 안 되고, 드러나야 했다.
말투, 옷, 행동 하나하나가 '밀리지 않기 위한 무기'였다.
그래서 강한 척했고, 똑똑한 척했고, 앞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방어는, 사실 너무 쉽게 부서지는 유리성이었다.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쌓은, 얇은 벽을 가진.
시간이 흘렀다.
부끄러움, 상실감, 실패와 후회들이 나를 찾아왔다. 인정받고 싶던 마음은 쉽게 꺾였고, 삶은 내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운동은 내 안의 분노와 무기력을 눌러주었고, 글쓰기는 흩어진 감정을 붙잡아주는 도구였다.
나는 점점 덜 격하게 반응했고, 더 깊게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쓰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 있었다.
지금 나는 예전보다 느리고, 그만큼 단단하다.
이제는 안다.
자존심은 외부를 향한 방어지만, 자존감은 내부에서 피어나는 수용이라는 것을.
전자는 누군가 건드리면 무너지고, 후자는 아무도 보지 않아도 꺼지지 않는다.
자존심과 자존감, 나는 어디에 가까운가?
질문 1 : 비난을 들었을 때
A. 반박하거나 상처받는다
B. 듣고 나서 필요하면 참고, 흘릴 줄 안다
질문 2 : SNS에 뭔가 올릴 때
A. 좋아요 수, 반응을 계속 신경 쓴다
B. 기록과 나눔이 목적이다
질문 3 : 실수를 했을 때
A. 창피하고, 숨기고 싶다
B. 실수는 성장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질문 4 : 남이 잘 될 때
A. 질투하거나 내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B. 축하하며 내 길을 다시 본다
질문 5 : ‘당신은 누구인가?’에 답하라면
A. 타인의 평가를 빌려 말한다
B. 스스로 정한 기준으로 설명한다
※ 각 항목에서 어느 쪽이 나와 가까운지 점검해 보자.
3개 이상이 A(자존심) 쪽이라면, 당신은 아직 외부 중심형이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운동을 한다.
몰두할수록 점점 그 목적이 뚜렷해진다. 예전처럼 '보여주기 위한 나'가 아니라, '놓치지 않기 위한 나'로서.
누군가 봐주면 고맙고, 칭찬하면 기쁘지만, 그것이 없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인정에 기대지 않고도 나를 존중할 수 있다.
자존감이란, 박수 없는 무대에서 계속 춤추는 힘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무대에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우리는 왜 박수 없는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는가?
윤동주는 시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썼을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그보다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의 시는 '전시'가 아니라, '내면의 증언'이었다.
세상이 알아보지 않아도, 그는 써야만 했다. 그건 존재의 증명이었고, 저항의 기록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그는 그 문장을 자신에게 남겼고, 우리는 지금도 그것을 빌려 자신을 다잡는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몸은 보여주기 위해 단련되고, 글은 반응을 위해 요약된다. 삶은 피드백을 위해 편집되고, 감정은 업로드된다. 보여야 한다. 그래야 존재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럴수록 불안해진다.
누군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
이 모든 구조는 '보이지 않아도 나는 존재한다'는 믿음을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묻고 싶다.
나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가는 나를 간혹 보여주고 있는가?
지금 이 글은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 끝에서 나직이 말해본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