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의 <GV 빌런 고태경>을 읽고
출간 당시, 인스타그램에 후기가 꽤 많이 올라왔던 작품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다. 출간 직후 읽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때는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한동안 손도 못 대고 있다가 7월의 절반을 보낸 후에야 읽게 되었다. <GV 빌런 고태경>을 읽으면서 몇 번 울컥했다. 몇몇의 문장들을 읽으며 그랬고,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나의 상황을 겹쳐 보며 그러했다.
영화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물론 영화 용어도 많고, 영화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넓게 보면 '꿈꾸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이 넘어가서도 꿈을 꾼다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말을 듣기 좋다. 여기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과 나를 겹쳐 보았던 걸로 보아, 나도 일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꿈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그날 뒤풀이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술을 마시고 전부 게워냈다. 수많은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내게 각인된 말,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저주 같은 그 말은 필름이 끊기기 전 들었던 조병훈의 말이었다.
"구린 영화를 찍으면 구린 사람이 되는 거야."
<GV 빌런 고태경>에서 한마디만 뽑는다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선택하겠다. 소가 여물을 곱씹듯 내내 곱씹게 되는 말이었다. 내 상황과 겹쳐서 그런 것 같다. 입사 면접에서 왜 이리 떠돌았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치 경력 기술서에 쓰인 몇 줄이 나를 '떠돌이'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혜나 역시 그의 한마디로 '구린 사람'이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노력한다고, 모든 게 인정되지 않음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비하당할 이유는 없다. 조병훈 교수는 혜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이후에도 '너', '야'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그녀를 얕잡아보고 있음을 표출한다. 잘 나가는 동기 동준에게는 '동준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업계에서 힘이 있는 사람에게 굽힐 수밖에 없음을 나도 알고는 있지만, 낮은 대접을 받는 혜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내가 무시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지 말아야지, 나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습관이 되지 않게 노력해야지 생각하게 되었다.
혜나 역시 영화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 주변의 영화인들 역시 영화로 돈을 벌고 있지는 않았다. 한국영화교육센터(한교영) 동기였던 승호와 윤미, GV 빌런인 고태경까지 모두 다른 직업이 있었다. 서울대 출신은 승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영화에 누구보다 열정이 있었던 윤미는 유투버로 활동하며, 영화를 누구보다 많이 보는 고태경은 택시 기사와 노인 문화센터 강사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넌 요즘 어디서 뭐로 돈 벌어?"
"나 요새 대치동에서 먹고산다."
대치동?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진 승호가 근황을 들려줬다.
"논술학원에서 주말마다 논술 답안 첨삭하거든. 대치동 학원가 주말 아침 풍경이야말로 스펙터클이야. 학원은 아침 9시에 시작하는데, 새벽부터 도로에는 학생들 태워다 주는 부모의 차들이 줄을 서고, 계단에서 건물 밖까지 부모들과 학생들이 줄을 서고, 강의실하고 복도에는 자리를 맡아둔 가방이 줄줄이 줄 서 있다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목록을 보고 있는 윤미가 자조하듯 말했다. 윤미는 늘 자기 조롱을 먼저 하며 자신을 방어했다.
"힙하다는 거 대체 뭘까."
내가 약간 실소했다.
"사람들이 따라다닐 걸 제공하는 거지 뭐. 예전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인도에 갔는데 요즘에는 잃어버린 자아가 아이슬란드에 가 있잖아."
"아유, 어르신. 이 수업은 제가 영화를 만들어드리는 수업이 아니라 만드는 법을 알려드리고 도와드리는 수업이에요."
"아니 그래서 내가 영상 다 찍어둔 거 가져왔잖아! 잘 만들어줘봐."
완전히 생떼 쓰는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었다.
꿈을 꾼다는 것 이후의 삶을 이 세 명, 아니 혜나까지 네 명의 삶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승호는 좋아하던 영화를 싫어하지 않기 위해 결국 다른 일을 선택하고, 윤미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고태경은 자신의 방식으로 영화를 좋아하며 꿈을 꾼다. 혜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일단 태경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한다. 네 명의 다른 삶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단 이 책을 읽어 보고 꿈 이후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예측해 보고 선택했으면 좋겠다. 책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실패만 가르치지 말고, 실패 이후의 삶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여러 직업 교육들이 있고, 업계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와서 강의를 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성공할 수 없음 역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기만 보고 도전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 실패기 역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한 사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걸 알고 업계에 뛰어드느냐 아니냐는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GV 빌런 고태경>이 나를 울컥하게 했던 건, 꿈을 꾸는 여러 방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실패 이후의 삶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꾸었던 꿈이 실패로 끝나도 괜찮다는 위로를 이 책에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