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아의 <(사물에게) 배웁니다>를 읽고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에 이어 <사물에게 배웁니다>까지, 임진아 작가님의 책을 모두 읽었다. 친구에게 선물한 적도 있다. 작가님 고유의 감성이 굉장히 따듯하고 아늑해서, 직접 영업하고 다녔다. <사물에게 배웁니다> 역시 영업을 나가야 할 정도로 따듯함이 배어 있는 책이었다.
영화로 따지자면,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같았다. 읽고 있으면 눈부터 마음까지 따스해져서 '이것이면 되었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내 주변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물건들이 고마워지고 사랑스러워져서, 뭘 더 욕심내지 않아도 좋을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아하면 이성적인 평가를 못 내리는 것처럼, '좋다'는 표현만 해서 어째 책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좋다'가 끝인 책인 걸 어쩌겠나.
직장인일 때도 집안일을 하기 위해 정말 정말 중차대한 일이 아니라면, 일요일은 일정을 잡지 않았다. 그날 청소, 빨래를 잘해두어야 집에 머무르는 다음 주의 저녁이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머무르는 때는 더욱 집안 정리에 신경 쓰는 편이다. 코로나로 외출이 자제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때 주변 사물들을 관찰할 기회가 늘고, 사물에 감사할 기회도 늘어난다. 그래서 지금 <사물에게 배웁니다>를 읽기에 더욱 좋은 때라고 생각한다.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해하지만 말고, 내 방에, 내 집에는 어떤 내 것들이 있고 그것들의 어떤 점을 내가 좋아하는지 찾으며 집 안에서의 생활을 좀 더 행복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에게 배웁니다>를 읽으며 내가 애정을 주는 사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마시는 것은 사랑한다. 커피, 술, 주스 등 액체로 만들어진 것들을 즐기고 사랑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컵에도 관심이 많다. 컵에 관심을 두다 보니 그다음에는 티코스터로 관심이 옮아갔다. <사물을 배웁니다>의 티코스터 이야기를 보며, 이런 나의 시간이 떠올랐다.
줄곧 지내던 나의 도시에서 사용하던 코스터는 그 순간 묘하게 낯설게 보이기도, 어제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잠들기 전 낯선 하얀 침대 위에 코스터를 깔고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올려두는 일은 이 도시에는 캔맨주에서 흐른 물 자국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묘한 다짐이 되기도 했다. (여행 필수품 '티코스터' 中)
나는 작가와는 거꾸로 티코스터를 사용한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닐 때, 커피 한 잔을 시켜도 점원은 정성스레 티코스터를 깔고 그 위에 컵을 놓아주었다. 그 정성이 예뻐서 티코스터를 하나 사왔고, 그다음 내가 자주 쓰는 물잔 아래에 코스터를 놓았다. 컵도 나도 대우받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지에서의 대우를 내게 직접 해주려고 티코스터를 사용한다. 그 작은 변화는 나만 알아보지만, 티코스터의 크기보다 더 크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처음 독립을 하던 날, 오빠가 이삿짐 정리를 끝내고 본가로 가기 전 이런 말을 했다.
"낡은 건 버려. 새 집이니까 걸레도 새 걸로 쓰고, 새 마음으로 살아."
이전에 얹혀살던 집이 너무 낡다며 징징거리는 동생을 보며 안쓰러웠는지, 내가 첫 입주자인 집으로 이사하자 오빠는 여기선 새 것을 쓰라고 했다. 그때 새 걸레를 쓰라는 말은, 그 정도 사치를 부려도 된다는 말로 들렸다. 열심히 산 나를 대우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금 집에서는 원하는 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티코스터를 사용하는 것, 물컵과 커피잔을 분리하는 것, 예쁜 맥주잔을 사용하는 것, 집 안의 데커레이션은 녹색과 회색으로 통일하는 것. 별것 아닌 일들이지만 , 이 자질구레한 규칙을 지키는 것이 내가 나를 대우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규칙을 통과하여 들어온 내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만족감을 얻는다.
<사물에게 배웁니다>의 저자 임진아는 나보다 이런 규칙을 더 명확하게 세워두었다. 그래서 자신의 곁에 있는 사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
"가난에 대해 쓴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생, 거의 평생 가난의 모습을 한 구름 아래에 살고 있으니까."
얼마 전 방바닥에 앉아 앞의 문장을 읊조렸다. '가난'이라는 단어에 유대감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단어가 가까이 있는 게 부끄럽지도 그렇다고 자랑스럽지도 않다. 나 자신이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것처럼. (어느 날의 '유리병' 中)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끄러운' 순간들이 너무 많다. 홀로 나를 평가하고 나에게 실망한다. 그런데 그녀는 가난도 자신도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뭐라고 정의할 수도 없는, 이 안온한 그녀를 닮고 싶다. 안온한 사람이 되어 그녀처럼 따스한 글을 남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