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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Nov 28. 2020

[독서 기록] 세상은 넓고 언니는 많다

-강이슬의 <새드엔딩은 없다>를 읽고

*웨일북에서 무료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1. 느끼하지 않은 말투라는 것


강이슬 작가의 전작 이름은 <안 느끼한 산문집>이다. <새드엔딩은 없다> 역시 느끼하지 않은 말투로 서술되었다. 그녀의 글을 읽으니 내 글이 느끼하다고 느껴졌다. 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짤 때 힘을 너무 많이 주면 짤주머니 옆구리가 터지는 것처럼,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면 힘이 과해서 강약이 없는 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최대한 생각이 났던 흐름대로 적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익숙해지니 힘이 들어갔나 보다. 이 책을 읽으니 느껴졌다. '내 글 느끼하구먼.'


느끼하지 않은 책의 효과는 소화였다. 요즘 어째 일없이 밥이 얹힌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새드엔딩은 없다>를 읽는 동안 잠시나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지, 라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유 없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장르였다. 하지만 이유는 있었다. '편안해서' 에세이를 읽음에 있어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새드엔딩>은 나의 이 선택 이유에 잘 맞는 책이었다.



2. 세상은 넓고 언니는 많다


강이슬 작가가 나와 동갑이라는 데에 놀랐다. 같은 나이를 먹고도 나는 여전히 땅을 짚고 헤엄치려다가 고꾸라져서 어깨를 다친 것만 같은데, 그녀는 같은 나이에도 너무 언니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p.152

"어째서 막내들은 하나같이 같은 병을 앓고 있을까?"

"무슨 병?"

"힘들다고 말하면 죽는 병."


p.154

그중 너무나 막내의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면 괜히 애틋해져서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다. 무리하지 말라고. 지금은 서툰 게 당연하다고. 시간이 지나면 잘하게 될 거라고.


특히나 이 부분을 읽을 때 그러했다. 나는 누구에게든 기대어야만 살 힘을 얻는 존재인데, 그녀는 막내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동갑이어도 멋지면 언니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슬 언니 짱'을 외쳐보았다.


세상에 멋진 언니들은 많았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말줄임표(민음사 유튜브)의 편집자들도 그러했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이 말을 그녀들도 하고 있었다. 인턴 생활이 힘들다는 독자에게 "전화를 땡겨받고 있다면 잘하는 것"이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언니였다.


올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힘들다'이다.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넘어가는 고개였는데도 숨이 자꾸 가빠졌다. 그런 내가 한심했는데,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자꾸 도망치고만 싶었다.


<새드엔딩은 없다>의 작가는 도망가지 않았다. 지옥고(지하, 옥탑, 고시원)에 살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게 참 멋있어 보였다. 그 사실이, 그녀의 서울살이가 위로가 되었다. 나와 같은 서른들이 삑사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으니 나도 같이 견뎌보자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이 들게 만들었으니 언니라고 불러야지 생각했다.


3. 울고 싶으면 울고 살자, 좀

p.97
하찮은 이유로나마 펑펑 울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산뜻해진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어서다. 울고 싶어도 울어선 안 되는 수두룩한 날들 사이에 울 일 아닌 일에 엉엉 우는 날 간간히 끼어 있다고 우리가 약해지거나 한심해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도 눈물이 없다고는 절.대 할 수 없지만, 나는 정말정말 눈물이 많았다. 하다못해 재능 선생님과의 마지막 날에도 울 정도였다. 그보다 더 커서는  울컥하는 마음에 지하철에서 울다가 휴지도 받아볼 정도로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새 눈물이 참아졌다. 어른이 된 걸까? 아니다.(아닐 것이다, 어른일 리가 없다.) 조금 무뎌진 것 같고, 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눌린 것도 같았다. 그런데 원래 눈물이 터지는 사람을 막아놓았더니, 엄한 데서 눈물샘이 터졌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소방차를 보다가 울었고, 또 어느 날은 친구와의 주말여행이 끝나고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차역에 서서 엉엉 울었다. 내 울음은 더욱 논리가 없어졌다.

작가와 친구들처럼, 대놓고 울어도 되는 자리가 하나 있다면 조금 나아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논리가 없어서 울어도 된다는 티켓을 받고 입장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렇게만 쓰면 친구들이 어이가 없을 듯하여 덧붙여보자면, 울고 싶을 때 만나자기에는 내 친구들이 소중해서 그런 자리를 안 만들고 싶다. 오래도록 나와 알아온 친구들은 이미 몇 번씩 이유가 있든 없든 울어대는 나를 위로해졌다. 감정이 전염되는 것처럼 매번 우는 나와 만나면 그들도 슬퍼질 것이다. 나는 게다가 의존도도 높은 편이라,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면 자꾸자꾸 불러댄다. 그런데 내가 너무 자주 우니까 친구들이 우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눈물을 넘겨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조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부를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나는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 그게 철없어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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