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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Dec 19. 2020

[독서 기록] 시집으로 답장하기

박세미 시집 <내가 나일 확률>을 읽고



안부를 전하듯 넌지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고민을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안부를 받듯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불행한 사족을 붙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친구는 사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사족일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이 시집 한 권을 보내주었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이걸 골랐을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장 한 장 넘겼다. 몇 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었고, 또 몇 개는 나에게 별 의미 없이 다가온 것도 있었다. 그리고 몇 개는 마음에 남는 시가 되었다. 다시 열어 그 구절들을 보니, 슬프게 읽히는 부분들이었다. 과연 아무 생각 없이 시집을 읽은 것일까 싶어졌다.


불을 끄지 않고 잠드는 이유는
조금 더 선명한 악몽을 꾸기 위해서다

머리가 잘리면 몸이 말해
몸이 말할 때 머리는 가장 투명해진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
작은 심장을 가진 아이가
낮게 깔린 공기를 붙잡고 서 있는 거

그러니까,
어렵고 무겁게 만들고 싶어서
힘껏 무기력해진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중에서


-


일기장엔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의 일기가 적혀 있는데
그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에 그 아이는 내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운 것도 같았는데
왜 일기장엔 '그 아이는 울지 않았다'고 쓰여 있을까
무엇을 커닝한 것은 아닐까
젯소를 페이지 전체에 바른다

-<흰 겹> 중에서


지우려 해도 지우지 못한 생각들이 시집을 읽은 것 같았다. 이 구절들은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어딘가에 할 수 없던 말들이기도 했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남고 말았던 것 같다.

책을 읽고 생각 하나가 남았다. 친구에게 '이 구절이 마음에 남았다고 하면 마음 아파할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그녀라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것 같지만, 왜인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 구절이 남았다고 직접 말해주진 못할 것 같다. 괜찮아지지 못해서 미안해서.


구구절절한 덧붙임
문학을 전공했지만, 시를 즐겨 읽지 않는다. 시를 즐기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를 뜯어내는 법을 배웠지, 즐거운 마음으로 읽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시집을 들면 여기서 의미를 굳이 뜯어내야 할 것만 같아서 읽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내 전공에 굳이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시를 분해하지 않으려고 해도 되는데, 그걸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가끔씩이라도 좋은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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