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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Mar 30. 2020

[독서 기록] 그들의 고민인가, 나의 고민인가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을 읽고


<헤살>이라는 작품을 읽고, 구병모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위저드 베이커리>를 쓴 작가라는 것도 이후에 검색해 보고야 알게 되었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지나다가 구병모 작가의 책을 집어 들게 된 건 그때 생긴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청소년 소설만 쓰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관심.


네 부부가 함께 사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의 이야기는 뉴스를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내 고민이자 내 세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담겨 있어 주변의 이야기를 보듯이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고민은 주거와 출산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주거의 문제.

수도권에 집중된 청년층과 그에 비해 부족한 주택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택 부족은 주택 전체 수(數)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주택 수가 모자라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이웃의 식탁>에서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네 가족이 이사 오게 된 것도 주택 때문 아니겠는가. 마포의 빌라에 살 때 발소리가 낼까 봐 조용히 계단을 올랐다는 효내의 회상처럼, 내 집이지만 내 집이기만 할 수 없는 집들에서 살던 네 가족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막 이사를 온 요진 역시 일터까지 긴 거리를 운전해야 하고, 모두들 대중교통이 없어 출근 시간이 30분 정도씩 늘어난 것은 예사이다. 그리고 여기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자필 서약서를 써야 하는데, 그 서약서의 내용은 아이 세 명 출산을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제 가족의 출산 계획까지 강요당해 가며 집에 대한 고통을 덜기 위해 네 가족은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여러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집에 대한 문제가 소설 속에서도, 우리 삶에서도 심각하다는 걸 여기서 절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친척집에 얹혀살고 있다. 외가가 당진으로 귀농하면서 서울에 집이 비게 되면서, 친척집에 얹혀살지만 혼자 사는 그나마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언제까지 여기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틈틈이 서울 원룸 전세는 얼마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데, 가끔 아무리 모아도 전세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행복주택 청약을 신청해 보려고 알아봤는데, 당첨이 되어도 보증금이 몇 억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조용히 꿈을 접었던 기억이 있다. 서울에, 수도권에 사는 청년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혼자 사는 집을 혼자 힘으로 구하는 것도 이렇게 팍팍한데 아이까지 있는 부부의 집을 부부의 힘만으로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네 이웃의 식탁>을 통해 훔쳐본 것 같은 마음이었다.







두 번째로 출산의 문제.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하려면 아이 셋을 낳아야 한다는 소설 속 정부의 방침은 협박처럼 들렸다.

집 없이 살지, 아이 키우며 살지 결정하라는 협박. 하지만 이 정도를 해주지 않으면 아이를 낳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하면서 만나게 된 분들 중에 셋이 아니라 한 아이가 생겨서 일을 그만두신 분들이 꽤 있었다. 그중 한 분이 “아이를 봐줄 분들도 없고, 회사가 기다려 준다 해도 내가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고, 나 역시도 돌아올지 기약할 수도 없다는 말이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마음에 와 닿는다.

면접을 볼 때부터 내게 결혼 계획을 묻는 회사가 많아졌다. 여기서 내가 결혼과 출산 계획이 있다고 하면 선뜻 나를 뽑을 회사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그림을 놓지 못하던 효내에게 가장 공감했다. 돈을 얼마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이 끊기지 않은 게 중요한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엄마라는 여자가 ‘돈도 안 되는 일’을 붙들고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보통은 엄마가 아이를 두고 일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학교에서 교양 수업을 들을 때 한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제 동생의 이야기입니다. 부부는 맞벌이였어요. 그런데 아이가 어릴 때 틱장애가 와서 보호자가 없으면 너무 불안해했죠. 그래서 부부 중 한 사람이 일을 그만두고 아이 옆에 있어 줘야만 했습니다. 제 동생은 3개 국어를 구사하고, 심지어 상대방보다 연봉도 높았지만 자신이 아이 곁에 있기로 해요. 왜냐고요? 제 동생이 아이의 엄마였거든요. 모두가 당연히 제 동생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이때 교수님의 동생이 여자라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이해가 되고 말았다. 연봉이 더 높고 재능이 있는 분이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남편이 그만두고 아이를 봐야겠다고 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로서 이런 인식이 출산을 고민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그런 나를 버리고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라는, 보이지 않는 눈. 소설에서도 이런 인식은 곳곳에 나온다. 실제로 소득을 벌어오지만 은오는 요진을 ‘집사람’이라고 부르고, 공동육아 때 필요한 음식도 보육자인 은오가 아닌 엄마인 요진이 한다. 효내도 프리랜서란 이유로 당연히 아이를 함께 돌봐야 한다는 강요를 받는다.




어릴 때 내 꿈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 그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 “네 꿈은 이루기 어려운 거구나. 힘들겠어.”라고 말할 때는 역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서른이 가까워지며 이제는 선생님의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당연해 보였던 것들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려는 사람들이 더 위대해 보인다. <네 이웃의 식탁>의 인물들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게 힘들어 무너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이는 소설이었고, 지금은 이 작품이 현실과 가깝지만 미래에는 이게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남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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