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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Apr 07. 2020

[독서 기록] 술맛 나는 책

김혼비의 <아무튼, 술>을 읽고



술이 좋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술자리의 적당히 들뜬 분위기도 좋아하지만, 술 자체도 좋아한다. 평소의 나는 굉장히 꼿꼿하고 융통성이 없는데, 술을 마시면 그런 것들이 느물느물해져 잠깐 그 벽을 허물어도 괜찮은 기분이 드는데 이 기분이 좋다. 아주 잠시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이런 내게 <아무튼, 술>은 읽지 않고 넘길 수 없는 책이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느낀 점은 '나는 편식하는 음주가'였다는 점이다. 와인, 칵테일, 양주, 소주, 맥주를 섭렵한 저자에 비하자면, 나의 술 세계는 아주 좁다. 그것도 맥주에만 편향되어 있다. 그 안에서는 세계를 넓히려고 하지만 저자의 술 세계에 비하면 작은 세계를 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소드를 나눠서 살펴볼 때, 술을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일이 많다. 폭탄주를 처음 마시고 아찔했던 경험이라든지, 술 마시는 것이 운동을 이기는 경험이라든지, 많은 예외를 만들어 술을 마실 계기를 마련하는 경험이라든지. 대부분의 것들에 술내음이 묻어 있어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에세이는 '술과 욕의 상관관계' 파트였다. 욕을 해도 욕 맛이 나지 않아 고민하던 저자에게 친구분이 해주셨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욕을 하려고 노력해서 잘되는 게 아니라 욕이 나오는 상황에 놓이면 욕이 저절로 잘 나온다는 말이었다. 


술맛도 그런 것 같다. 기분이 정말 좋으면 시원한 술맛이 느껴지고, 기분이 정말 더러우면 위를 긁어내는 듯한 술맛이 느껴진다. '오늘은 정말 맛있게 먹자!'든지 '오늘은 진짜 위장을 긁어보자!'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술맛이 발현되는 게 아니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술맛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 맛도 그런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살다 보면 정말 욕이 찰지게 입에 붙는 날이 있다. 저자 김혼비 님이 상사와 함께 경찰서에 갔다는 날 또한 그런 날이 아닐까 싶다. 회사 욕을 찰지게 해대며 잔뜩 마신 술에는 숙취가 없었다. 나는 그랬다. 아마 저자님이 그날 마신 술도 그렇게 발화해버려 저자님을 취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조금 다른 쪽의 말이지만, 직장 생활을 오래오래 할수록 성격이 나빠지는 것 같고 욕을 찰지게 하게 되는 것 같다.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 취급을 받기도 했고, 여자니까 신입이니까 등의 이유로 착취를 당하기도 했고, 선의도 도와준 행동은 배신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 일들을 4~5년 겪으면서도 이전 성격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회사에 가기 싫은 마음에 잠들지 못해 매일 맥주 두 캔을 까던 시절도 있었고, 밤을 새우고 회사를 나가는 일도 있었고, 한 시간마다 깨고 잠들면서 회사를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도 욕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는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라, 가능한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그런 공자가 아니었다.


갈수록 파열음과 쌍자음을 쓰지 않고도 욕을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일상어로 기분 나쁜 말을 조합하는 재주가 생겼다. 이미 생겨버린 능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런 능력을 연마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술이 당기고 욕 실력을 늘려가면서 다녀야겠나 싶은 마음에서다. 그런 경험은 이제까지 해온 사람들로 끝을 내도 충분할 것 같다.






혼술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는다. '여자 혼자 술 마셔도 되는 세상'까지는 발전했지만, 그런 여자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는 세상 속에는 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집혼술파인데, 밖혼술파를 택했을 때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외국에 나가서 혼자 큰 테이블에서 맥주를 시킬 때도 보지 않았던 눈치를 우리나라에서 보고 있다. 조금 이른 시간에 술을 시켰을 때 봐야 하는 눈치도 있다. 술 마시는 것에 대한 눈치가 필요한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여자 혼자 밖에서 술 마시는 것이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조금 더 자유로운 술꾼들을 양성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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