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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Jan 15. 2020

엄마와 학생 사이


2019년 1월, 임신기간의 절반을 막 지난 21주

휴직을 했고 대학원 예비학기가 시작됐다.      


본 학기 시작에 앞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영어수업을 들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에 6시간씩 수업을 들어야 했다. 3월까지는 유학에 필요한 토플 성적도 만들어야 했다. 쉬는 시간에는 토플 공부에 매진했다.

 

학창시절 12년 개근을 한 전형적인 우리나라 공교육의 산물인 나는 듣기와 읽기는 잘 하는데 쓰기와 말하기는 영 어설프다. 그런데 오전 3시간은 영어 말하기, 오후 3시간은 영어로 논문쓰기란다. 이것 참 쉬운 게 하나 없다. 10년 전에 대충 한번 보고 말았던 토플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정 안 가게 어렵다. 한국말로 들어도 못 알아들을 천체, 지질 강의를 영어로 듣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결국 휴직하고 한 달 동안 학교에서 회사처럼 앉아 영어공부를 했다. 일이 아닌 공부라 다행이기는 했지만, 다리 부종이 생겼고 하교하면 물에 젖은 걸레처럼 축 늘어져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무언가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회사 다니는 6년 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의 부족함이 보여도 그럴 채울 시간이 아니 의지가 없었다. 아, 여기가 부족하구나, 나중에 시간 나면 메워야겠다. 하고 넘어간 순간들이 수두룩했다. 영어도 그런 구멍 중에 하나였는데 온전히 영어공부에 매진하라고 시간이 주어지니 그것도 나름 힘들지만 즐거웠다.        


학교만 다녔느냐. 가만히 있질 못하는 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예비학기 시작 전에 대학원은 별로 힘들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예비학기 시작 전 이미 우쿠렐레와 필라테스 수업을 등록해버렸다. 진퇴양난이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미 일은 벌려놔서 중간에 그만 둘 수도 없고 아주 난감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저질렀던 나의 무모함들때문에 임신기간 내내 편히 쉬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첫 번째 저지른 일은 서재 방 한구석에 5년째 방치된 우쿨렐레. 입사 첫 해에 질러버린 내 민트색 우쿨렐레는 음치 주인을 만나 여태 그냥 인테리어 소품으로 서 있었다. 일단 질러 놓고 일주일에 한 번 저녁에 개인교습을 받았다. 휴직 전에는 회식을 뿌리치고 수업을 들으러 갔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한 시간 정도 밀린 과제를 하다가 우쿨렐레를 치러 가곤 했다. 워낙 칭찬을 잘해주는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음악 천재가 된 기분으로 즐겁게 배웠다. 갈수록 어려워져서 어느 순간 좀 재미가 없어지긴 했다.

      

두 번째는 필라테스였다. 임신 초기가 하필 1년 중 회사가 가장 바쁜 시기여서 산부인과에서 피고임이 있다며 집에서 쉬라고 경고를 받은 덕분에 처음 한두 달은 회사 말고는 어디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온 몸이 근질거리고 몸은 찌뿌둥해서 운동이 가능하다는 16주가 되자마자 동네 필라테스 학원을 등록해버렸다. 힘들었다. 임산부 반이라고 해서 들었는데 선생님이 내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잊은 게 아닐까 싶게 근력운동이 힘들었다. 나날이 배가 불러오느라 사실 몸이 좋아지는지 근육이 붙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냥 언젠가 다 좋겠지 라는 마음으로 12월 추운 겨울 패딩을 꽁꽁 싸매고 운동을 하러 갔다.           


주말 빼고 평일 5일 중 매일 학교를 나가고, 하루 저녁은 우쿨렐레, 두 번은 필라테스를 다니다 보면 의외로 굉장히 힘들다. 이게 취미인지 돈 내고 고생을 산건지 의구심이 드는 시기가 온다. 말이 좋아서 취미이지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늘 즐겁지만은 않다. 내가 일을 벌이고도 허덕이면서 보냈던 임신 기간이었다. 나중에는 필라테스 끝나는 날만 손을 꼽아 기다렸고, 만삭의 배에 우쿨렐레를 올려놓고 치면서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내가 이렇게 무모한 사람이기에 여기까지 왔다 싶은 마음에 그냥 내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왕 유난스러웠던 임신기간인데 그냥 ‘태교’를 위해서였다고 명분이라도 붙여줄까 싶다. 요즘 유행한다는 영어태교, 아기 정서에 좋다는 음악태교, 엄마와 아기의 건강을 위한다는 운동태교까지 태교란 태교는 풀코스로 다했다고 포장이라도 해보자.    

  

사실, 태교는 커녕 나중에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아기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머리 뜯으며 영어공부를 할 때면 영어태교는커녕 나중에 아기가 영어만 들어도 싫다고 쳐다도 안 볼까봐 걱정도 됐다. 부산스러운 엄마를 만나 뱃속에서부터 별의 별 고생을 다했다. 정말 고맙게도 아기는 어디하나 아픈 곳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고, 결국 임신 직전까지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특히나 토플 영어 듣기시간에 폭풍태동을 하면서 무사히 시험을 보게 해준 아기에게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토플은 시험시간이 4시간으로 자주 화장실을 가는 임산부에게 쥐약과도 같은 시험이다. 시험 준비하면서 시험공부보다 화장실에 더 신경을 쓴 건 수능시험 이후 처음인 듯하다. 임신 27주, 31주 이렇게 두 번 토플시험을 봤는데 시험 감독관들이 나를 보면 어쩔 줄 몰라 했고, 많이 힘드시겠다며 허리를 부여잡고 시험장을 나온 나에게 측은한 눈길과 작은 응원을 보내주었다.     


태교인지 극기 훈련인지 모를 시간들을 거치면서, 나는 아기가 자식이라기보다 뭔가 듬직한 팀원 같고, (나 혼자) 전우애가 샘솟는 느낌이었다. 이 시간들을 거치면서 막연하게 태어나서도 나와 손발 잘 맞춰가며 미국 생활도 잘해낼 수 있겠지 라는 믿음이 생긴 것 같다. 과연 그 믿음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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