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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란 Feb 12. 2022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캐나다에 있습니다

제안은 했지만 미팅은 할 수 없는 직업인이라니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다섯 개의 기획안을 썼다. (그중 세 개는 쓰고 있다.)

"하고 싶은 거 해봐"라는 말을 듣자마자, 꼭 내가 하고 싶었지만 창업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엄두를 못 내던 마음 속 기획안 하나를 꺼냈다. 바로 A님에게 연락을 했다. 아니, 연락하기 전에 거절당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고 싶은 거 하라던 대표님은 딱 하나 단서를 달았다. 

"거절을 받는 일이 흔할 거야. 거기에 상처받지 마. 네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름 큰 회사에서만 일을 했다. 특히 마지막 회사는 소위 말하는 '회사 이름빨'이 있었다. 그 회사빨도 통하지 않는 분도 분명 있었지만,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는 힘의 7할은 회사 이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걸 알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아무리 나와 좋은 인연을 지속하고 있는 분이라고 해도 1인 회사나 다름없는 곳에서 같이 일하자고 하면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예상한다 해도, 실제로 거절당한다면 조금은 마음이 상할 건 틀림없었다. 오랜 시간 그 거절을 경험해온 대표님은 미리 나를 그렇게 걱정해주었다.


"회사가 어딘가는 상관 없어요.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좋죠."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지난 프로젝트 이후, 수많은 곳에서 A님께 협업 제안을 했다고 한다. 본업 때문에 다 거절하고 있었다는 A님은 바쁜 일정이 끝나는 하반기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내 기획안을 보기 전까진 그 어디와도 계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그 전화 통화가 정말 '시작'을 알렸다. 결정된 건 없었지만, 그래도 힘이 되었고 응원이 되었다. 


마음 속에 있던 두 번째 기획안을 꺼낼 준비를 했다. 그건, 지난 회사에서 이미 내가 한 차례 고민했던 거였다. 나는 꼭 하고 싶었지만, 충분히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팀장님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이즈가 더 큰 걸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었으므로 애써 설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거절당하고, 거절하는 일이 많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획만은 퇴사 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빚처럼 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이 기획의 B님과는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이미 다른 곳과 계약을 해서 진행 중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더더욱 거절당할 준비를 했다. 

"이 프로젝트를 가장 잘 완성할 사람은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시 왈칵. B님은 다시 한번 그때의 내용을 보내주었다. 마음의 여유 때문일까. 그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히 보였고 하나의 완성된 형태가 상상되기 시작했다. 


이젠 세 번째 기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하고 싶던 거였다. 아무런 계획 없이, 정말 그냥, 2년 동안 가끔씩 꺼내 보강하던 기획안이 하나 있었다. 나와 미팅은 했었지만, 작업으로 이어지진 않았던 C님이었다. 메일을 열어 '안녕하세요'를 쓴 순간, 그동안의 진심이 쏟아져 나왔다. 왜 이 기획을 하고 싶은지, 왜 C님이어야만 하는지, 내가 그 동안 어떤 생각을 쌓아왔는지를 정리했다.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한 번 뵙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면 거절이 아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검토하겠다는 표시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한 번 뵙죠.' 

내가 캐나다에 있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말한다 해도 서서히 알리면 될 개인적 TMI라고 생각했다. 제안 메일에 미팅하자는 대답을 수없이 받았음에도,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걸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답변을 했다. '제가 캐나다에 있어서 미팅은 어렵습니다. 대신, 대표님이 직접 미팅에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별 내용이 아닌데, 써놓고 보니 이상하게 뭔가 사기 메일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함께해보자고 연락을 해서 알겠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외국에 있다며 다른 사람에게 토스를 하는 상황이라니. 

그런데 이 말조차 내 자격지심 같은 거였나 보다. 예상 외로 C님은 너무 수월하게 이 이상한 상황을 받아들이시고 캐나다에서의 내 미래에 응원을 해주셨다.


이 세 번의 제안에 대한 답을 전할 때마다, 대표님은 거의 궁디팡팡을 해주셨다. 정말 이러다가 내가 브레이크댄스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은 폭풍 칭찬이었다. 그렇게 당근을 실컷 먹이신 대표님은 본론을 꺼냈다.

"C 기획안까지 정리하고, 이제 네가 엄청 하고 싶다던 그 돈 많이 드는 그거, 그 기획안부터 꼼꼼하게 정리해봐. 난 사실 그게 제일 궁금해."

그렇다. 내가 대표님께 목청껏 울부짖은 기획안이 하나 있었다. 돈도, 시간도, 인력도 엄청 많이 들 게 뻔하디 뻔한 대형 프로젝트 같은 것. 큰 건이라, 지난 회사에서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며 거절당한 것. 이제 그걸 기획안으로 정리할 때가 온 거다.


그런데, SNS를 보다가 그만... D라는 인물에게 꽂혀버렸다. 직장인일 때, '팍!'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으레 그랬듯, 그냥 순간 모든 게 구상된 거다. 대표님에게 미리 상의도 없이, 일단 질렀다. D에게 메시지부터 보냈다. 사실 답이 올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유명인이니, 1인 회사의 제안을 설마 듣겠냐는 마음이 컸다. 

"너무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으니 전화주세요." 하루 만에 답이 왔다. 이번에도 다시 답장을 해야 했다. '죄송한데 제가 캐나다에 있어서...' 중요한 통화일 텐데 보이스톡으로 하다가 몇 번 끊기는 상황이 생기면 민망할 테니, 이번에도 내가 벌인 일을 대표님이 수습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나는 다섯 번째 기획안을 쓰고 있다. A 기획안과 대형 기획안은 계속 보충 중이다.


이 한 달 간의 제안 메일들을 통해 나는 '오~ 나 일 잘하나 봐' 이런 걸 얻은 게 아니다. 그런 것도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지난 직업 인생에서 바닥친 직업적 자존감을 일으켜세우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다만, 하나의 응원이 한 사람의 도전을 또 다음 번으로, 그리고 또 다음 번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걸 알았다. A 님이 내게 힘이 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때 이후로 B도 C도 D도 없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말에 힘을 얻어 B님께 연락을 했고, B님의 상냥한 마음으로 C님께 연락할 수 있었다. C님이 내가 캐나다에 있는 걸 이해해주지 않았다면 D님에게 연락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없으므로 절반의 성과라고 한다지만, 이거조차 그 세 분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정말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 외엔 갚을 길 없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잘해야지.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조금 더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힘이 되고 응원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니, 더 고운 말들을 써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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