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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란 Feb 07. 2022

이것은 디지털노마드인가 아닌가 #2

하나의 일 같지만 여러 개의 일을 했다

퇴사 결정부터 해외 이주까지, 모든 것은 갑자기 일어나 두 달만에 진행이 되었다. 그러니까 퇴사 결정 전 날까지도 나는 내가 퇴사할 줄 모르고 열심히 회사 일을 했다. 

그 중 퇴사 두세 달 전, 계약한 건이 있었다. 벼락 치듯 떠오른 아이디어를 후다닥 기획안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걸 현실로 옮겨줄 너무나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획안을 멋지게 작업해줄 사람. 문제는 그분이 자기가 하긴 어려울 거 같다며 한 번 고사를 했고 그걸 설득해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됐는데, 내가 먹튀하는 꼴이 되었다는 거다. 

회사에서는 그 기획안은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계약을 파기할 것을 권했다. 칭찬 같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1~2인 기업도 아니고, 어느 정도 규모 있는 회사에서 직원 한 명은 소모품일 뿐이다. 나사 하나가 빠지면 다른 나사를 충분히 끼워넣을 수 있다. 다만, 내가 쓴 기획안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고 다른 프로젝트보다 많은 시간(야근)을 요했다. 자기의 기획이 아닌 것을 긴 시간 야근까지 불사하며 불만 없이 해낼 사람을 찾아 설득하기 귀찮았던 것일 거다. (실행비 대비 매출이 크지 않다고도 예상했겠지.) 

이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길게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분께 새로운 회사를 찾아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분은 그렇다면 꼭 내가 외주로 이 기획을 완성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 일을 해내야 하는 때가 바로 내가 두 번째로 '외주를 하지 않겠다' 선언한 시점이었다. 


마지막 외주라고 생각했다. 사실 하는 일에 비해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적었다. 그래도 해냈다. 눈이 빠질 것 같고, 수없이 해외 에이전트나 담당 관리자들과 연락을 하면서 기획 당시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을 완성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뿌듯했고, 꽤 성공했다. 


세 번째로 '외주는 이제 그만' 선언을 했다. 당분간은 계획하고 미뤄두던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연락이 왔다. 안 하고 싶다고 거절하려던 찰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말았다. 재미있을 거 같았다. 나란 인간을 움직이는 대부분의 원동력은 '재미있을 거 같다'는 착각이므로 결국 맡고 말았다. 재미는 있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계속 생겨났다. 그래도 일이라는 건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는 법. 애초에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지었을 때, 대표님(클라이언트)이 후속 작업 외주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아, 이거 마무리 내가 해야 할 거 같은데...'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아가고 있던 단계라서 또 다른 작업자가 붙는다면 일이 커질 거 같았다. 나는 내 발등을 찍고 후속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 일을 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대표님께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것이 체택되었고 대표님은 이번엔 마무리 작업까지 해보는 건 어떨지 제안하셨다. 


아... 그러니까 그 마무리 작업이란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거였다. 팀장님이 건넸던 숱한 빨간 펜 자국의 종이들과 한숨이 직업인으로서의 내 자존감을 한없이 갉아먹었다. 그것들 때문에 다른 회사에서 팀장급으로 이직 제안이 왔을 때도 자신 없어 했었다. 캐나다에 온 후,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젝트를 끌어가보라는 들어왔을 때도 '마무리 작업 제외'를 조건으로 내건 건 그런 이유였다. 

조심스레 대표님께 내 마음을 이야기했다. 사실 그 대표님은 사적으로 친하고 좋아하는 언니라서 더 이야기하기 쉬웠다. 의외로 응원이 돌아왔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로 들렸고, 정말 도전하는 기분으로 마무리까지 일했다. 

"잘했더라. 좋았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눈물 날 뻔했다. 그래, 나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대표언님, 사랑해요.) 


그 응원이 나를 움직였다. 언젠가 다시 월급쟁이로 복귀하고 싶다는 꿈을 건드렸다. 나 자신의 일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에 잘할 수 있는 건 서포트 하는 일이라는 믿음이 다시 한번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안 할 거라던 외주 바닥에 다시 뛰어들기로 했다. 이번엔 기획부터. (잘 될 지는 모르겠다.)


이것저것 했다. 나는 N잡러인가? 다 동일한 일이므로 N잡러는 아닌가? 그렇다면 디지털노마드인가? 인터넷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이 일은 기본적으로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진짜 디지털노마드가 되어 프로젝트 전체를 해결하는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포기했던 건 이 일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해외의 내가 그것을 제대로 하기엔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N잡러인가 아닌가, 디지털노마드인가 아닌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는 것 외에 뭐가 중요할까. 물론 때때로 그냥 놓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핑계는 내게 여전히 달콤하다. 


브런치에 뭔가를 계속 쓰고 싶었지만 뭘 써야 할지 잘 몰랐는데, 가끔 이렇게 N잡러인 듯 아닌 듯 디지털노마드인 듯 아닌 듯 살고 있는 거에 대해 남겨보기로 한다. 물론 일을 계속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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