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님 작가의 2018년 책 <나의 두 사람>을 읽은 후,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책 생각이 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꾸 과거를 꺼냈다.
할머니는 그것을 '까죽나물'이라고 불렀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는, 그것의 이름이 정말 '까죽'인 줄 알았다.
식물의 이름이 '가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할머니의 가죽나물 레시피는 튀김이었다.
물에 갠 튀김가루에 가죽나물을 살짝 담갔다가 튀겨냈다.
막 기름 목욕을 마친 가죽나물 튀김을 입에 넣으면 첫 맛은 고소했고 뒷 맛은 쌉쌀했다.
할머니의 집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가죽나물 튀김을 맛보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십구제를 지내기 위해 할머니 댁 근처 절에 갔을 때다.
사십구제를 끝내고 절에서 밥을 줬는데 가죽나물 무침이 있었다.
늘 튀김으로 먹던 것을 무침으로 먹으니 이것 또한 별미였다.
나는 그것만 가지고 밥 한 공기를 비워냈다.
그때 생각했다. 아마 가죽나물 튀김은 기억 속에서만 머물게 될 거라고.
어쩌면 우연히 들른 시장에서 가죽나물을 발견하고는 한 봉지를 집으로 사와 할머니의 맛을, 할머니를 잃은 후에 본 맛을 시늉 낼 수는 있을 거다.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하지만 그 맛과 똑같지는 않겠지.
예전처럼 맛있게 먹을 수는 없겠지.
그런 음식들이 몇 개 있다.
친할머니의 까죽나물 튀김과 닭 볶음.
(할머니가 닭 볶음이라고 부르던 요리는 시중의 닭볶음탕보다는 찜닭에 가까웠다.)
외할머니의 청국장.
이건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매도 다시는 그 맛을 못 볼 것들이다.
가끔 미각은 기억을 앞선다.
청국장을 먹을 때마다 나는 외할머니를 그리워하고, 미디어에서 간혹 가죽나물이 나오면 어김없이 친할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닭 요리를 볼 때마다 친할머니의 레시피를 못 배워둔 게 아쉽다.
그런데 엄마가 그랬다.
친할머니의 레시피를 진작에 배워뒀지만, 아무리 따라하려해도 그 맛이 안 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은 사람만 데려가는 게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이기도 했던 맛과 멋과 공기가 모두 함께 데려가버린다.
남아 있는 곳이라곤 오직, 기억 속뿐이라서 여전히 그 맛과 그때의 순간들이 이렇게 그리운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