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아주 오래전에 그런 적이 있다.
샤워를 하다가 얼굴에 묻은 비눗물을 닦아내느라 눈을 감고 떴는데, 앞이 캄캄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떠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엄마, 나 앞이 안 보여."
울먹이며 소리쳤을 때, 화장실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너 거기 있었니? 정전이야."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살면서 종종 그날의 어둠이 떠올랐다.
<부산촌놈>이라는 tvN 예능을 통해 배우 허성태 씨는 호주의 한 카페에서 일하게 된다.
하루는 그 카페의 사장이 커피와 빵 봉지를 허성태 배우에게 주면서 저 앞에 서 있는 노숙자에게 전해주라고 한다.
왜 노숙자들까지 챙기냐는 제작진의 물음에 카페 사장은 "세상일은 아무도 알 수 없고, 내일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지금 돕는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오래전 경험했던 찰나의 어둠을 떠올렸다.
살면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했을 것이다.
말로, 시선으로, 생각으로 의도치 않게 차별에 동조했을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제약이 점점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조심성이 마음에 들어서 더 조심히 살아가고 싶다.
다인종이 살아가는 도시에 살다 보니, 차별은 결국 차별로 돌아온다는 생각을 한다.
캐나다에 대해 알아가며 제일 마음에 들었던 말은 이곳이 '모자이크' 나라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가 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저 다 다른, 다 특별한 사람들일 뿐. 그 안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과 다른 뭔가 특별한 삶을 간절히 원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겐 차가운 눈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 이중적이다.
1월 4일은 세계 점자의 날이다.
내가 겪었던 아주 찰나의 공포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일의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던 텔레비전 속 카페 사장의 말을 떠올린다.
내가 세상을 그나마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수많은 이야기 덕임을 잊지 않는다.
그 이야기들이 단지 시선이 앞을 향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들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특정 부류에만 전달되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다.
서울 노원구의 점자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제 전국엔 30개의 점자 도서관만 남아 있다고 한다.
도서관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누구만의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나도 모르는 차별이 언젠가 나에게도 닿을 수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