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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리어스 Aug 19. 2024

적당히 행복하기에 실패한 여름휴가

제주 서귀포 스테이 - 스테이 느릇


Intro

제주시 북동쪽 ‘조천’에는 둘째 이모의 집이 있다. 아기 때에는 나와 사촌들이 낚시를 하는 외가의 집이었고, 지금은 이모가 숙소를 겸해 머무르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일 년에 두어 번은 제2의 집처럼 내려가니 딱히 여행객처럼 긴 갈치구이나 딱새우 등을 먹는 일들은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부터 에코백을 매고 내려가 이모와 커피를 마시며 유튜브를 보고, 고양이를 만지다 보리빵을 먹고 돌아오는 등의 루틴이 나의 즐거운 제주 일상이었다.


노리민박의 ‘노리‘에 이어 둘째로 들어온 ‘동산’


그러다 올 여름 서울 직장인(?)끼리의 여름휴가 기회가 생겨 성수기에, 조천이 아닌 서귀포에 내려가보게 되었다. 며칠간 정신 못 차리고 헤엄을 치고, 돈을 주고 파라솔도 빌려 보고, 외국인들 사이에서 땀 흘리며 성산일출봉도 완등하는 등 새로운 경험들로 보낸 시간.


그 중 특히 이번 여행에서 특별한 기억을 남겨준 표선읍 ‘스테이 느릇'에서의 경험을 기록해 본다. 긴 후기를 쓰는 것은 10여 년 전 아코르 호텔을 투어 하던 더 트래블러 리포터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가겠지만 간직하고 싶어 내 나름대로의 시간을 정리해본다.




스테이 느릇



숙소가 맞는 첫 여름

재미있는 것이 출발 전부터 각자 속으로 '숙소 여름 후기가 이렇게 없나‘ 서로 의아했던 것. 그런데 알고 보니 작년인 23년 10월에 정식 오픈 후 올여름이 이 숙소의 첫 여름이었던 듯하다.


주차를 하면 바로 보여지는 전체 뷰


이곳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의 날씨는 안전하게 맑았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큰 시설이 없는 덕에 들려오는 소음 하나 없었다. 우리가 수영 대결을 하면서 하는 시답잖은 농담이나 첨벙거리는 소리, 졸졸거리는 호스의 물소리 그리고 주변의 작은 새와 큰 까마귀들의 소리 정도뿐. 타인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고요한 여름의 꿈같은 공간이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야 디자인그룹 '지랩'에서 느릇의 디자인을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아보니 이모네 숙소 ‘노리민박’과 면한 ‘눈먼고래' 그리고 근처 '조천댁' 역시 지랩의 포트폴리오로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체크인

얼리 체크인 없이 오후 4시부터 무인으로 진행되었다. 누구와도 대면 없이 도어록 번호로 심플하게 건물을 찾아 입실할 수 있어서 우리는 좋았다. 다만 체크인 직전 숙소를 향하는 가는 길 들어가는 입구가 안으로 숨어 있어 지나치다 보니 사이니지가 조금 더 나와 있어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정갈한 숙소와 메밀밭 뷰, 귀여운 웰컴 키트


입실하면 실내 공간은 약간의 단차로 나뉘어져 있고 실외에서 바라보면 숙소 정면과 후면의 개방감이 아주 대비된다. 정면으로는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만큼 위치가 높고 높이가 좁은 창이 나 있는데 까치발을 들면 중앙 수영장과 정원이 예쁘게 보이고, 후면으로는 완전하게 트인 통창과 테라스가 시원한 메밀밭으로 바로 이어져 있다. 테라스 양쪽의 현무암 돌담이 사선으로 디자인되어 답답하지 않게 객실을 분리해 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음식이나 음주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메밀밭을 보면서 멍하니- 양치를 하기도 꽤나 좋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슬쩍 설치된 개수대가 뭔가 귀엽다


야외 수영장

거의 전지훈련처럼 땡볕에 산을 오르고 물에 뛰어드는 시간으로 휴가를 채울 정도로 (심지어 나는 화장품 호수가 바뀌어 서울로 돌아올 만큼) 레저를 좋아라 하는 우리는 숙소의 수영장에서도 한참 물방개처럼 헤엄을 쳐댔다. 때마다 다르겠지만 묵는 내내 우리는 그 어떤 투숙객분들과도 마주치지 않았으며 + 물은 너무 차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고 + 하늘은 맑아 수면은 반짝반짝 더 아름다웠다. 수영장 운영시간은 때때로 바뀌는 듯한데 낮 수영과 아침 수영 모두 즐길 수 있어 미련 없는 시간이었다.


회사를 3일이나 비우고 다녀온 휴가였지만 숨길 수 없는 즐거움




구조와 소재

ㅁ(미음) 자로 정원과 풀장을 감싼 콘크리트 건물들의 구조는 내게 고요하게 몰입하는 경험을 주었다. 살고 있는 서울 집 건너편 대단지 아파트처럼 적용될 때면 이런 답답한 구조가 있나 싶지만... 둘러싼 건물들이 낮거나 중앙에 아름다운 조경이 있다면, 꿈을 꾸는 것처럼 아름다운 느낌을 선물해 주는 것 같다.


미음자 구조를 오롯이 담을 순 없지만, 숙소 위로 올라가면 큰 구조를 조금 내려다볼 수 있는 산책로가 멋지게 만들어져 있고


개인적으로 어두운 소재와 낮은 건물, 중앙의 정원은 김창열미술관과 같이 고요하고 우아한 느낌을 전달해 주었다, 사진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그 외 숙소 이모저모

뱅 앤 올룹슨 스피커, 정성 들여 놓인 어메니티들, 다이슨 에어랩, 정갈한 식기들과 충분한 와인잔 등이 과하지 않게 오밀조밀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연필을 직접 깎아 메모할 수 있는 노트패드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실컷 그림도 그리고, 감사 편지도 한 장 남기고 나오는데 잘 썼다.


튀는 톤이 없이 매트하고 정갈한 무드



조식: 카페테리어

촌스럽게 새벽부터 배가 고파 잠이 깨는 나로서는 꼭 숙소 조식이 아니더라도 아침식사가 몹시 중요한데, 불안하지 않게 숙소 예약 시 메인 메뉴와 서브 시간대를 미리 고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투숙 기간 중 시간에 맞춰 카페테리어로 가면 흑돼지 패스츄리와 잠봉 크로와상 두 가지를 메인으로 해서 작은 수프, 요거트, 감귤 주스가 공통으로 내어 주신다. 빠르게 먹고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은 시간이 아니라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아주 천천히 정성스레 준비되는 시간이 더욱 편안한 마음을 갖게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운영하는지 모르겠으나 17년도 동생과 방문했던 대만 'Inhouse Library' 조식의 경험과 매우 비슷했다



느릇 근처에서 함께 들리면 좋을 식당: 복돼지식당

숙소 위치상 차를 끌고 나가 식사를 해야 하는 위치라 미리 알아보았는데, 차로 10분이 되지 않는 거리에 독특하게 직접 캔 고사리가 잔뜩 나오는 고깃집이 있었다. 주인 내외분들도 정말 친절하시고, 두툼한 오겹살을 옆 테이블에서 직접 구워 깔끔하게 내어 주는 식당. 고기 전에 호박잎을 잘라 넣은 수제비와 보들보들한 전을 함께 주시니 한식을 좋아한다면 꼭 메시지로 예약을 하고 방문해 보자.


메뉴 하나하나마다 약간의 스몰톡 곁들여 주시는 즐거운 저녁식사




Thanks to

본인의 소중한 휴가이기도 한데, 자꾸 뭔가 두고 오거나 실수하는 나를 옆에 태우고(미안...) 며칠 동안이나 제주를 지그재그 해가며 고생해 준 오빠. 휴가란 혼자 즐기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던 나에게 편안한 마음과 나답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남겨주었다. 적당하지 못할 만큼 좋았던 최고의 여름 선물.


Summer vacay with WW




참고할만한 링크

디자인그룹 '지랩' https://z-lab.co.kr/place-all

표선 '복돼지식당' https://naver.me/x8lij2VG

조천  '노리민박' https://www.instagram.com/noriminbak.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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