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인생극장 – 노명우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 William Shakespeare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그저 배우들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 사회학자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생에 관해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이야기’라는 부제의 책을 출간했다. 이제는 작고하신 1924년생 아버지와 1936년생 어머니의 삶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글을 쓴 과정은 부모를 여읜 작가에게는 ‘치유의 순례길’이었고, 결과로 나온 책은 늦게나마 부모님께 띄우는 추도사이자 사모(부)곡이다. 그 과정은 또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개인의 가족사를 되돌아보는 일이고, 그 배경에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작가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을 보낸 중국의 심양(예전의 봉천)과, 징용병으로 끌려갔던 일본 나고야를 방문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느끼려 창신동 산동네와 낙산공원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50년대 한국전에 참전한 캐나다 부대 앞에서 사진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캐나다 부대가 철수를 시작하자 미군 부대를 따라 아무런 연고도 없던 파주시 광탄면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한 ‘레인보우 클럽’을 운영하게 되는데, 이야기의 배경으로 5~60년대의 한국 사회의 기지촌과 세상 풍경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소설가 박완서가 살아냈던 50년대 서울 풍경과 묘하게 겹치거나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다. 미군 부대가 한국군 사단본부로 바뀌면서 ‘레인보우 클럽’은 ‘무지개 다방’으로 변모하고, 이 시절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었을 작가는 무지개 다방의 ‘어린 주방장’으로서 주변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해 배우며 성장해 간다. 책의 각 시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음악과 영화와 흑백사진들이 들어 있어, 말 그대로 한 시대를 살다간 이들의 ‘인생극장’을 지루하지 않게 살펴볼 수 있는데,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 또 다른 힘은 글쓴이의 진솔한 말하기에서 온다. 이는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학의 도리가 아니라고’ 한 작가의 생각에서 비롯한 것일까? 비슷한 시대를 통과해온 독자라면 공감과 회고의, 세대가 다른 독자라면 다른 세대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독서경험이 될 것이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르기에 인생극장의 막이 올랐고, 그 막은 다시 내려가야 한다. 나의 부모가 인생극장의 무대에 올랐다가 퇴장했고, 나는 그 무대를 물려받았다. 무대 장치가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부모를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무대 장치 또한 투덜댄다고 바뀌지 아니하니 그것을 원망하며 째려보기보다는 찬찬히 살펴보는 편을 택하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 맘에 들지 않는 무대장치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진정한 유산인지도 모른다.” (p.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