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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일리아드

by Kyuwan Kim

(연극) 일리아드... 기원전 그리스의 원형극장에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시를 읊던 음유시인의 모습이 이랬을까? 놀랍게도 한 사람의 배우는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뮤즈의 가벼운 도움으로 110분 동안, 15,000행이 넘는다는 트로이 전쟁의 대서사시를 목소리로, 온몸으로 격렬하게 토해낸다. 완독한 지 2년이 다 되어서 이제는 가물가물해지던 브리세이스, 파트로클로스, 메넬라오스, 안드로마케를 비롯한 무수한 인간과 신들의 이름들이 다시 소환되어, 숨을 참으며 무대에 몰입한 시간이었다. 무대는 몇 개의 돌계단, 계단 아래 그리스의 투구가 쌓여있는 쇠창살이 쳐진 좁은 공간, 각이 진 현대적 느낌의 기둥들, 음료를 만드는 간단한 테이블이 전부이다. 무대가 열리면 굳이 현재의 시점을 감추지 않고, 배우는 관객들의 타로점을 봐주며 객석에 말을 걸기도 하고, 공연 중에 무대 옆의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다가, 10년을 끌면서 이어진 고대의 세계대전 마지막 50일간의 처절한 이야기를 활화산처럼 쏟아낸다. 두 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에 트로이 전쟁의 중요한 전개 과정과 극적인 장면을 효과적으로 요약한 것은 원작이 갖는 각본의 힘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와 문명을 망가뜨리는 이러한 전쟁이 단지 흘러 가버린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구상 곳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현실임을 배우는 세계전쟁사의 중요전쟁들을 하나씩 호명하면서(한국전쟁을 포함하여) 관객들에게 섬뜩하게 각인시킨다. 최소의 무대장치와 기술적 도움으로 연극의 원형을 체험한 강렬하고 압도적인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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