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권성우선생의 첫 산문집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을 읽었다. 불의 8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내고, 대학에서 그 후의 오랜 시간을 책과 문학으로 견뎌온 한 지식인의 쓸쓸하고 서늘한 내면 풍경을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책은 크네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신문에 실렸던 컬럼을 묶은 듯한, 1부 ‘푸른 언덕에서-청파동 통신’, 8년 동안의 메모나 일기를 모은 2부 ‘단상모음 2012~2019 - 한 비평가의 세상읽기’, 문학이나 자신이 읽고 만난 작가와 관련된 글을 모은 3부 ‘고독, 책, 슬픔 - 문학 에세이의 매혹’, 문학의 더 큰 배경을 이루는 시대와 정치에 관한 글을 모은 4부 ‘정치·문화·대학을 읽다 -컬럼과 에세이’가 그것이다. ‘제주 4·3에 비견되는 대만 현대사 최대 비극 2·28 사건’을 다룬 영화 비정성시를 통해 해방공간의 우리의 역사를 상념하는, 책 제목이 된 첫 글을 비롯하여 1부의 모든 글에는 쓰여진 연도와 추후에 독자들이 참고할 책들이 소개되어 있어서 글이 쓰여질 당시의 저자의 정서와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몰락의 분위기를 발산하는 대학’에 재직하면서 갈수록 ‘연성화 되고 실용화’하는 대학의 수업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면서도 ‘쉽게 선택한 허무, 안이한 절망을 넘어서 시대의 심연을 통과한 희망’을 기다리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총인구 대비 출국률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최근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부는 해외여행 열풍에 대해 저자는 ‘문화와 생각이 다른 타자를 이해하고 문화적 톨레랑스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이 시대에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는 자신의 과오, 이중성이 한순간 개혁에 대한 환멸을 불러올 수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글의 어느 대목은 올해 세상을 뜨겁게 달군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2부는 마치 저자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그의 내밀한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장이다. 아울러, 어쩔 수 없는 하나의 개인주의자로서의 자신과 세상에 난만한 허무를 의식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이해로 한 발자국 진전하고 싶고’, ‘담대한 비판적 상상력, 정치적 올바름, 미학적 품격’을 갖춘 글을 기다리는 평론가로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작고하신 평론가 김윤식 선생님과 최인훈 작가에게 헌정한다고 저자는 머리글에서 밝히고 있는데, 3부에서는 이에 더하여 저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문학의 근간을 형성한 작가와 작품들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는 모든 미디어로부터 거리를 두고 오로지 ‘인생의 구원이자 학교’로 책읽기에 몰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엄중한 마음으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상찬되고 있고, 같은 맥락에서 재일 디아스포라 작가 서경식, 김학영의 작품이 언급된다. 그 중, 2015년에 12권의 한국어 번역으로 완간된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존경은 애틋하여 책의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동경에서 직접 김석범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문학작품을 통해 해방공간을 재검토’하는 것이 ‘화산도’의 존재의의’라는 작가의 소개와 더불어, 이 책을 ‘남북한, 일본과 미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원과 의미를 근원적으로 되묻는 귀한 역사적 사료’라고 평하고 있다. 저자의 이런 애정과 관심은 재일 한인문학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기도 하다. 저자에게 문학과 글쓰기의 기본을 깨닫게 해준 ‘죽음 이외의 휴식은 없는 정신’ 김윤식선생에 대한 회고담, 최인훈 작가 영전에 띄우는 편지, 명동에서 보낸 유년기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평론가가 되기까지 자신을 되돌아본 ‘고독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여정’ 등의 글도 인상적으로 읽었다. 4부는 ‘문재인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여 시대와 달라진 세태에 대한 글들이 묶여있는데, 더욱 악화된 채, 때로는 변주된 채 계속되고 있는 ‘분단시대의 지식인’의 표상으로서 ‘광장’의 이명준이 갖는 현재성을 재조명한 글과, 오랜 세월 ‘은둔과 침묵 속에서 자신의 올곧은 문학적 자존심을 지켜온’ 작가 조세희를 통해 ‘이 시대의 난장이’들을 소환한 글들이 눈길을 끌었다. 짧게는 80년대 이후, 멀게는 6~70년대부터 시대의 터널을 같이 지나온 한 평론가의 진솔한 글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격변했던 최근 몇 년간의 우리 사회, 역사와 더불어 내가 지나온 오래된 흔적들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 편의 외국영화 제목에서 시작한 산문과 평론의 글들을 밑줄 쳐가며 읽는 이유는 이들이 내게 가져다 줄 새로운 깨달음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