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유럽여행은 빠듯한 일정에, 가늠하기도 힘든 넓은 대륙을 기차로 달리며,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장소나, 교과서에서 본 그림들 앞에서 뻔한 증명사진을 찍으며 정신없이 스쳐지나가기가 쉽다. 하지만 나이도 좀 들고, 사회생활도 좀 해서, 경제적으로도 더 나아진 중년의 나이라면 같은 곳을 여행하더라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느끼는 것도 사뭇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 사회학자가 ‘국적과 국경을 뛰어넘은 어느 사회학자의 예술편력기’라는 부제로 ‘두 번째 도시, 두 번째 예술’(2020, 북인더갭)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으나 우리들의 첫 유럽여행처럼, 20대 때 생각없이 지나쳤던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 구석구석을 글로 기록했다. 구석기 시대 벽화의 유적이 남아있는 프랑스의 아르데슈에서 시작한 여정은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 피렌체,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의 도시 빈, 19세기 전세계 문화와 예술의 수도 파리, 20세기 양차 세계 대전의 상흔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도시 베를린,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지나 서울에 이르른다. 이는 거칠게나마 인류 문명 발달의 흔적을 뒤쫒는 여정이고 저자는 이를 당대의 다양한 문화 예술과 건축, 인물의 이야기로 풀어가는데, 학교의 미술시간을 ‘예술수업이 아니라 국가주의 학습시간’으로 기억하고, ‘예술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한국의 8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낸 저자는 동시대의 보통의 독자들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베네치아에서 그는 ‘예술은 죽음을 구원하지 못한다... 예술은 쇠락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는다. 예술의 본질은 사라짐이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콘스탄티노플 멸망 이후 ‘로마의 계승자이자 아테네의 계승자가 된’ 피렌체에서는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라는 조각상을 보고 고통의 보편성을 확인하면서, ‘인간의 모습을 한 구원’에 대해 사유하기도 한다. 궁정에 속한 전근대적인 ‘궁정예술가’에서 시민관객을 향해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시민예술가’로서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서 저자는 그들이 음악을 통해 담고자했던 혁명의 시대의 계몽적 이상을 꼼꼼하게 읽어내고 있으며, 당대 청중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쇤베르크의 음악에서 ‘고립될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진리를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 생각한다. 벤야민을 매혹시켰던 파리에서 그는 근대의 도시로 재탄생하는 파리의 역사와 이 도시로 몰려들었던 스탕달, 에밀 졸라, 헤밍웨이, 마네, 모네 등의 작가와 예술가의 흔적을 쫓다가,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방문자들 틈에서 ‘자본이 예술을 흡수하면 예술의 충격은 사라진다.’고 느낀다. 후발 주자로 서유럽의 발전된 자본주의의 대도시를 따라잡으려 했던 베를린에서 저자는 영화와 음악과 스포츠를 자신의 정치적 야먕에 이용하려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조명하고, 그가 열광한 비장하고 신화적인 바그너의 음악이 실제로는 ‘주체가 자발성을 단념하고 수동적으로 태고적인 것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파시즘을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된 과정을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온 2020년의 서울 거리에서 그는 자신이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우리 역사 속 풍경과 연결시켜 보는데, 서울의 어느 길목에서 그는 문득 콘스탄티노플과 피렌체, 빈이나 19세기의 파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을, 이 짧은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훑어 보니, 한 권으로 담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독자에게 눈높이를 맞춘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은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마음 속의 두 번째 도시를 찾아 다시 유럽의 어느 도시를 찾게 될 때는 처음보다는 더 나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는 두 번 째로 방문하고픈 도시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