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고독을 같은 이름으로 인식했다.
젊은 시절의 나는 그 차이를 알기엔 너무나 조급했고, 혼자라는 상태 자체를 견딜 줄 몰라했다.
외로움이든 고독이든, 그것이 찾아오면 즉시 밀어내야 할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혼자 있다는 감각은 곧 실패와 결핍의 증거처럼 여겨졌고,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 무조건 사람을 찾았다.
전화번호를 뒤적여 누군가를 만났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시간을 연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채운 만남의 대부분은 지나고 나면 공허했고, 함께 있었으나 연결되지 않았고, 웃었으나 충만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소중한 시간 한 덩어리를 버리고 왔다는 기분만 남았다.
그럼에도 같은 선택을 반복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고독을 조절할 재간이 없었던 나는, 사람들 주변을 맴돌며 겉돌았다.
싸이월드 파도타기로 일면식도 없는 동창을 만났고, 친구 집에 눌러앉아 밤을 탕진했다.
헤어짐이 아쉬워 아버지의 차를 몰래 몰고 나가 친구들을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은 관계를 향한 열망이라기보다, 혼자가 될 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렇게 나는 금쪽같은 시간을 도로 위에 뿌리고, 허공에 흘려보냈다.
이 모든 것을 상담을 통해서야 깨달았다.
외로움과 고독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다루어야 할 상태였다는 것을.
그 시간을 몰아내며 탕진한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지 이제야 실감한다.
혼자 있는 시간도, 함께하는 시간도 모두 삶에 필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기에, 타인의 존재로 나를 채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불안했기에,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감정이 쉽게 비집고 들어왔을 것이다.
만약 그 시간을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고 대했다면, 뇌는 조금 더 깊게 사유했을 것이고,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이제는 알 것 같다.
혼자가 되어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만이, 함께 있을 때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고독은 공백이 아니라 여백이며, 그 여백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외로움과 고독은 삶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말을 거는 조용한 신호이며, 나를 성장으로 이끄는 통로였음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혼자 있는 시간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배움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한 수의 말)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가장 깊은 사유는 늘 고요 속에서 태어났다.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통찰을 얻었고, 잭 웰치는 제너럴 일렉트릭 회장 시절 매일 한 시간씩 창밖을 바라보았으며, 빌 게이츠는 해마다 2주를 외딴 오두막에서 보냈다.
그들은 누구보다 바쁘고 시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의도적으로 고독을 선택했다.
그 고독은 결핍이 아니라 쉼이었고, 단절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외롭고 고독한 시간은 자신을 바라보고 돌아보며 내일을 준비하는 값진 순간이었다.
창의성과 통찰은 그 침묵 속에서 자랐고, 성장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혼자만의 여백에서 일어났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어부 산티아고가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상어 떼와 외로운 사투를 벌인 것처럼 우리는 인생의 바다에서 상어 떼들과 외로운 승부를 펼쳐야 한다.
내 손이 찢겨 나가도, 내 살점이 뜯겨 나가도, 철저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인생의 외로운 홀로서기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자고 말하고 싶다.
너무 외로워 몸서리쳐질 때면 우리 가끔씩 서로 안아 주자.
사랑하는 이들의 외로움을 안아 주자.
그러면 그들도, 나도 한 발씩 내딛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테니까.
건강과 행복 즐거움과 미소를 전하는 마법사 &
<매일의 태도> 저자 김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