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내 주는 전부로서의 한 걸음

by GZ

나도 모르게 상황에 주눅 들 때가 있다. 특정인이게 주눅이 드는 적은 사실 잘 없다. 나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상황이다. 내가 상황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내가 놓여 있다는 느낌이 나의 이성을 마비시킬 때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번 주눅 늘면 혼자만의 생각으로 침잠하게 된다. 침잠이 길어지면 무엇을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자포자기적 심정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나는 지독히 무기력해진다.

아직 덜 영글어서인지 나는 여전히 감정을 가리는 데 서툴다. 딴에는 나에게서까지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아 하는 본능이기는 하지만 이게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프로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약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쩐지 잘 고쳐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속내를 터놓는 것만큼이나 감정을 숨기는 것은 나에게는 참 힘든 일이다.

속내를 터놓는 게 잘되지 않게 된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하는 오랜 습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복장 터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 정도의 인생 질곡은 겪어왔으므로 속이 갑갑해지는 느낌이 어떤지 나는 너무도 잘 안다.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하지만 나에게도 때로는 더부룩해진 속을 터놓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여 그렇게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속을 터놓는 것은 마음이 가벼워지기 위함 일진 데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더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게의 증가는 상대의 반응이나 당시의 대화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해결되지 않을 상황에 있어 가장 든든한 아군은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는 인내라는 것을 알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극도로 긴장하게 되고 그로 인해 견딜 수 없는 피로를 느낄 때면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내가 시간을 지나게 하는 것인지 시간이 나를 지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시간이라는 것에는 신묘한 힘이 있다. 시간은 망각이라는 두뇌의 지대한 힘과 함께 신기하게도 시련이나 상처가 희미해져 보이게 또는 사라져 보이게 하는 효력을 발휘하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인생의 시련이라 할 수 있는 일에 마주했을 때는 운명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온통 원망의 날을 세웠던 게 조금 덜해졌다. 상황이 어질러져 있어 보일수록 긴 심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알려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을 어쨌건 쳐내야 할 상황에 대면할 때면 눈앞의 핸드폰이나 노트북에서는 최대한 멀어져서 먼 곳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들여다보고는 한다. 물론 나의 두뇌는 이것조차 까먹어서 나를 곤란하게 하기는 하지만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호흡을 고른다. 그렇게 시선을 분산시켜야 눈앞의 상황마저도 보이지 않는 듯한 아득함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 생존본능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을 때 그러한 나로부터 한걸음 멀어지는 것은 나에게 닥친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함이 나만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려준다. 상황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나에게 닥쳤으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태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은 적이 없음을 보여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심장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시련의 화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게 큰 위로는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까맣게 타 버린 가슴에도 공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준다.

그러니까 당장 숨이 넘어갈 듯할 때는 모든 것에서부터 떨어져 있어 볼 필요가 있다. 너무 멀어지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딱 한 걸음만 떨어져 서 있어 볼 필요가 있다. 그 한 걸음이 때로는 전부가 되어 나를 지켜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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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father's House from My Life_M_Chagall_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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