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한다. 나는 나의 말을 그리고 너는 너의 말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입을 움직이고 표정을 읽는다. 그러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잡거나 박수를 치기도 한다. 말을 주고받는 그 순간의 공감에는 상대가 나의 말을 온전히 다 알아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늘게 되면 상대와 내가 굉장히 친해지게 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 좋은 기억에 세월이 붙으면 소위 말하는 우정이 쌓이게 된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너무도 예민하기도 하고 편헙하기도 하다. 그래서 꽤 긴 시간을 함께 어울려 지내며 이지러질 리 없는 우정을 쌓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도 그게 틀어지는 것이 한순간이 되기도 한다. 친한 사이일수록 그 신뢰를 틀어버린 지점을 명확히 말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 갈등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서운해하는 경우를 천천히 살펴보면 자신의 감정을 상대가 잘 감지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 많다. 친하니까, 나를 잘 아니까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불편해하는지를 알아서 잘 파악하여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쩐지 잘되지 않으면서 마음의 동요가 생기는 것이다. 서운한 감정이 일면 솔직하게 상대에게 말하면 되는데 어쩐지 그것은 하고 싶지 않다. 왜 그것도 몰라주나 하는 서운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나의 서운함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나에게 둔감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말을 곧 내가 별것 아닌 일에 민감하게 구는 사람처럼 비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선은 이러하고 후는 이러하니 하는 정리를 하면서 그에 의해 나의 이미지를 버리면서까지 서운해진 내 감정을 정리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서운한 감정을 서운한 그대로 방치해 버린다. 그래도 상대에게 이러저러한 장점이 있다고 포장하며 말이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면 내가 서운함을 느끼게 된 상황이 사실은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일 것이라고 이해를 하려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감정이 움직여버리면 상황의 전후를 판단하기도 전에 상대의 의도를 내 멋대로 결론 내려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의도라는 것도 상대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는 상처가 된 그 상황도 상대의 기억에는 없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친분과 이해에 대한 나의 과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상대에게서는 어떤 일에 있어서는 서운함을 느끼게 했을 수 있다.
왜 나의 감정을 솔직하고 유연하게 대화 상대에게 표현하지 못할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대화 속에서 내가 동하면 말이 잘 통한다는 말을 자주 뱉을까? 말이 잘 통한다는 말을 생각한다.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잘 행동해 주는 사람과는 아마 말이 잘 통하는 것일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사건건 나와 부딪히는 것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오히려 그 역이 아닐까?
언어에 민감한 촉수를 가져서인지 나는 긴 대화 끝에 집으로 돌아와 그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 과정에서 묘하게 틀어져 있는 대화의 전제를 알아채게 된다. 그러면 애초부터 모든 대화는 어긋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화는 상대가 뱉은 수많은 단어 중 나에게 깊이 각인되는 단어를 내가 다시 조합하여 나의 의미장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장은 나의 기분과 기억 그리고 그 의미장을 엮는 습관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진다. 따라서 소통이 잘 된다는 것은 나의 전제와 상대의 전제의 어떤 지점이 닿음이 있다는 것이지 100%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운함과 어긋남은 있을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이 단순한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힘든 것은 마음의 어떤 부분은 언어가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소통 가능의 불가능성과 소통 불가능의 가능성 사이를 오가며 누군가와의 사귐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행동이나 말로 인해 서운해하고 괜히 불안해도 하며 화를 내는 것은 어쩌면 상대에 대한 나의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통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에 대한 기대는 어긋나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보통의 경우 기대를 한 것은 나이지 상대가 그 기대를 요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도 각 대화는 다르게 각인된다. 말하자면 원활한 소통이 곧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통을 가능하게 하려면 이 오해 먼저 지워가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