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이 아니니까

by GZ


돌도끼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돌도끼를 든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고 있자면 끝없이 누군가를 입에 올리고 있는 우리네 대화 풍경이 겹쳐 보인다.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칭찬이 되었건 욕이 되었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나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달가워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런 상황에 조금 더 민감한 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내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어쨌건 관심의 되었다는 것이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다. 무관심하다는 것보다는 관심을 받고 있다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을 테니 가볍게 들어 넘기는 되는데 그게 참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어쩐지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좋은 말은 좋은 말대로 나쁜 말은 나쁜 말대로 말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았더니 나에게는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고자 하는 고약한 습성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는 직접 만나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관계 속에서 구축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에게 각인된 나의 이미지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나에게 가장 근접해 있는 가족이라 하더라도 온전한 나의 모습을 알기는 어려운 법이니 혈연으로조차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오죽하랴. 더구나 거기에 이해관계가 얽혀 버리면 이미지 구축은 허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를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허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어쩐지 그게 쉽지가 않다.

머리로 아는 이것을 가슴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라는 사람을 내보일 새도 없이 규정당해 버리고 누군가가 만든 나의 상을 깨기 위해 하릴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소모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 또는 나와 관련된 일화를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꽤 듣는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질문한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냐고. 그러면 상대는 얼버무리고 마는데 그때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다.

나라는 사람이 있고 그에 맞는 이름이 붙어 있고 그래서 이름에 맞게 뭔가를 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대상으로 뭔가를 만들어낸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의 일면을 보거나 듣고 판단한 것이 되니 틀린 것이 아니다. 나도 다면적인 인간은 아닌지라 어쩌면 그들이 한쪽에서 본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는 나보다 나의 실체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나는 그와 같은 이미지 조각놀이를 선호할 수 없다. 다면적이거나 다층적이지 못한 내가 감히 누군가의 한 면을 내 깜냥으로 묘사해 전달한다는 것도 어쩐지 껄끄럽고 그것으로 인해 그 누군가의 이미지를 타자에게 잘못 각인시키는 것도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 또한 성인군자처럼 누군가의 일상이나 누군가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태생이 착해 빠진 데다가 경청과 방청객 모드가 몸에 탑재되어 있어 소위 말하는 험담 현장에서 꽤 호응을 잘해준다. 호응한 순간에는 최대한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되니 나로서는 그 수긍이 응당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내 후회를 하게 된다. 그날의 대화에 등장한 아무개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텐데 하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화를 반추해 보는 것은 내가 배려심이 깊어서라거나 착해서가 아니다. 나도 어느 자리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을 텐데 그때 누군가 한 사람만은 내 편이 되어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내 편에 서 준다고 해서 그 대화가 달라지는 것도 내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돌도끼를 들고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쪽에도 길이 있다고 꼭 그 길이 아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쩐지 좀 멋있어 보인다. 상상만으로도 멋있어서 나도 따라 하고 싶어 지니까, 그런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게 되고 소심하게나마 나도 그런 노력을 해 보게도 된다.

돌을 들고 한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 또한 인생의 한 재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어쨌건 공감하고 동감하는 대화에 열 뜨기 마련이고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활기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 대화의 무리 속에 저쪽에도 길이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도 있고 돌도끼를 내려놔 보자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재미있는 일도 많이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도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원시인이 아니니까 말이다.

s-d_soucis_courbet_highres(1).jpg G Courbet_Les Soucis_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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