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해 드리고 존중받겠습니다

by GZ

연락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관계를 맺지 않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는 사소했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옹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다. 무심한 사소함이 반복되어 무딘 나의 옹졸함을 건드렸고 나는 관계를 멈추는 것 외에는 그 옹졸함을 고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들은 요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나에게서 상처가 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종이에 벤 것처럼 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랜 시간 꽤 규칙적으로 이어져 온 사소한 무례가 남긴 상처의 통증은 생각보다 가볍지가 않다. 쉬이 아물지 않고 끝없이 덧나 꽤 신경 쓰이게 하는 것. 사소함이 남긴 상처는 그런 것이었다.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극약 처방을 하기 전까지 나에게 사소한 것들이 남긴 상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감정의 촉수를 무디게 해 두면 시간이라는 명약과 더불어 절로 치유되는 것이었다. 부딪힘이 많다고 하여 일일이 따져 드는 별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소소한 감정 소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을 품 넓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소한 무례로 인해 언성을 높인 적이 거의 없었다. 적당한 감정의 소모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관계로 인해 마음의 불편을 느낄 때마다 좁은 내 속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지나오게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샌가 타인을 위해 조건 없이 내 것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부탁하기 쉬운 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친절하고 헌신적이며 착한 사람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나에게 덧대 주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감정을 소진하고 그로 인해 일희일비하게 되는 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던 것뿐, 주변에서 칭찬하는 내 모습은 사실 꽤 긴 시간 상당한 노력을 들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갈등 상황에 대면하여 흥분하고 분노하는 내 모습으로 인해 수십 번 수백 번 그 상황을 상기하여 당시의 감정을 내게 설명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싫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참았다. 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는 감정을 억눌러 버리면 얼굴을 붉힐 일도 언성을 높일 일도 없어질 터였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와 곱씹어야 할 장면을, 나와의 싸움을 줄일 수 있었다.

참는 데 인이 박인 나였으니 내 인생에서 누군가와 두드러지게 갈등을 빚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인생에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였던가. 더는 예전과 같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화번호를 지우고 연락을 끊고 가끔 마주치게 될 때면 눈인사도 피하게 될 만큼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말이다. 불편했다. 그들을 아꼈으니 마음도 아팠다. 꼬여버린 관계가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 좀 더 영민하게 내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해 왔더라면 이렇게 남남이 될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수없이 나를 질책하기도 했다.

지금은 덤덤해진 그 관계를 생각하며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하였고 왜 그것을 굳이 결행하였을까 하는 질문을 종종 한다. 바늘이 되어 꽂히는 말이나 거절의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갈등이 빚어지면 그 상황을 내가 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으로 정리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내가 나를 상처 입히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을 지우는 일이 아무래도 나에게는 녹록하지 않았다. 게다가 애를 써서 헨 마음을 매만져 놓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한 무례가 다시금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알게 되었다. 무례는 습관이고 그 무례에 대한 사소함이라는 무딘 감각은 결국 관계를 일그러뜨리게 된다는 것을. 함께 했던 시간이나 정에 끌려 불편을 감수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서로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습관은 쌓음의 결과다. 하여 잘 고쳐지지 않는다. 나조차 어쩌지 못하는 것이 습관이기도 하니 거기에 친분이라는 관계의 풀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그러니까 타인의 무례도 사소함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사소함과 상대의 사소함이 맞지 않는 것뿐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씁쓸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애써 맞춰 가려 하기보다는 사소함이 어긋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거나 그도 싫으면 관계의 폭을 줄여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단의 칼을 들었다.

하지만 긴 시간 함께 했던 누군가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역시나 아픈 일이었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엄청난 패배감과 서러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왜 시의적절하게 적정거리를 두지 못했을까 상대가 나를 멋대로 휘두르려 하는데도 괜찮다고만 했을까 위한다는 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왜 잊어버렸던 것일까. 자책은 반복되었으나 후회는 시간을 돌려놓지 못했다.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지 않은 것뿐 나는 아물지 않고 남아 있는 상처를 때때로 느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나만은 내 편이어야 하니 지금은 내가 그렇게 소위 ‘손절’해 버리는 것이 내 나름의 상대에 대한 존중이었다고 생각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나를 바꾸는 것도 잘 안 되는 인사라 그들을 바꿀 의지도 의사도 없다. 어떤 노력으로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변한다고 하여도 나의 알량한 잣대로 그들을 바꾸는 것이 그들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나아가지 않고 거기에서 관계 맺기를 멈춰버린 것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인정한다는 나 나름의 존중이었던 셈이다. 허니 나는 나로 인해 불편을 느끼는 누군가가 나의 방식으로 나를 존중해 준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그래왔듯 그들 또한 자신을 지켜내야 했기에 어찌할 수 없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선택을 한 것일 테니 거기에는 감정이 개입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정이 많이 들었다고 해도 진심으로 아껴왔던 사람이라 해도 나를 상대에 맞춰 바꾸면서까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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