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그림을 그린다. 아이의 요청에 맞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빠진 아이는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그려달라고 했다. 잠깐 그러다 말려니 했는데 잊을 만하면 크레파스를 들고 나를 찾아와 그림을 그려달라 보챈다. 그러면 나는 화면에 캐릭터를 띄워두고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는 동그란 눈으로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조금 가늘었으면 좋겠어, 칼은 내가 그릴게, 입이 이상해 같은 말을 쏟아낸다.
그러다가 색칠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지 아이는 그림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크레파스를 든다. 아이의 요청에 응한 것이기는 하나 딴에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지라 아이를 제지하며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 내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는지 아이는 내가 그림을 다 그려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눈으로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집어넣는다. 그 사이 나는 다시 손을 움직인다.
전시회를 하거나 출품을 할 것이 아닌데도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앞에 두고 있는 아이와 나는 상당히 진지하다. 이게 뭐라고 선이 삐뚤어지면 아이는 집중하라는 듯한 눈으로 나의 눈을 응시하고 그러면 나는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젖어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어 숨을 죽인 채 미간에 힘을 준 얼굴로 다리가 완성되고 손이 그려지고 신발이 형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 한다.
그렇게 그림이 완성되면 아이는 정말이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해맑은 얼굴로 똑같이 생겼다고 요란을 떨며 스케치북을 집어든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케치된 그림에 색을 입혀가는 아이를 쳐다본다. 아이의 손이 나 혼자서는 그렸을 리도 없고 나 혼자 완성해서는 의미도 없을 그림을 채우고 있다. 그렇게 아이가 땀까지 흘려가며 완성해가고 있는 그림을 보고 있자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른은 형체를 만들고 아이는 색을 채운다. 아이와 내가 진지하게 이어오고 있는 그 단순한 작업이 왠지 모르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이는 제가 원하는 형체를 마음에 들게 만들어낼 수 없기에 어른의 손을 빌린다. 네가 해 봐라고 하면 나는 못 해, 무서워라고 하며 내 뒤로 숨어버리며 말이다. 그러면 나는 두려움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준다.
나라고 원형 그대로 그려낼 수 있겠냐만 제 손으로 형체를 그려본 적 없기에 아이의 눈에 나는 그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을 뚝딱 만들어내는 대단한 사람으로 비친다. 내 눈에는 어깨와 허리의 균형도 맞지 않아 보이고 허리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선은 일그러져 보이는데 원작의 아우라 때문인지 아이는 내가 그려준 그림이 마치 제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귀하게 여기며 색을 더해간다.
진중한 아이의 눈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조금 더 반듯한 선으로 조금 더 완벽한 그림을 그려주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선이기는 하지만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낀다. 그림 연습을 조금 더 해 둘 걸 하는 후회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취미 삼아 그린 그림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게 될지 꿈에도 몰랐으니 딴에는 최선이었다며 씁쓸하게 위로하는 것 밖에 다른 수가 없다.
놀이를 위한 스케치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심각하고 진지해지는 걸까 하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게 나에게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형체는 세상을 구성하는 윤곽이다. 형상을 어떻게 그려내는지에 따라 세상은 조각된다. 그러니까 같은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해도 상황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맺힌다. 그러하기에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생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형체를 만드는 일은 세상의 보는 편견, 그러니까 세상을 향한 나만의 시선을 구축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저만의 형체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형체를 가지게 되는 것은 도화지를 구획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는 모든 도화지가 상상의 전당이 되어주던 자유를 형체에 맞게 재단해야 하는 과정을 이 아이도 거치게 될 것이며 색도 그에 맞게 조율해 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 삐뚤빼뚤한 그림이 아이의 세상을 한정하게 되지는 않을지, 조금 더 좋은 그림으로 아이가 더 너른 세상을 보고 더 크게 날갯짓할 수 있는데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하는 게 나는 겁이 났다.
형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만들어지고 관점은 세상을 보는 나만의 편견 어린 시선일 수 있다. 형체가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해 내는 것이라 해도 사회적 존재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형체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나의 편견이 없으면 형체를 구현해 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현되지 않은 형태는 규정될 수 없으므로 다만 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두 나만의 형체를 갖추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규정되지 않음을 선택하여 색만으로 세상을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디 세사가 그러하던가?
형체를 만드는 어른과 색을 채우는 아이. 아이에게 내가 잃은 것이 있고 나에게 아이가 채워가야 할 것이 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실물로 구현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과 손이 어긋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서툰 그림이나마 아이에게 끝없이 전해주는 이유는 인생은 본디 어긋나게 되어 있으며 그 어긋남을 긴 인내와 느긋한 호흡으로 조금씩 조율해 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