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액주사

그라는 무심

by GZ

잘려나갔거나 구멍이 뚫렸거나 검게 타버렸거나. 녹음만큼 짙은 그늘 밑을 걷는다. 줄지어 늘어선 나무 중 온전한 모양을 갖춘 건 없다. 원모습이 저렇지는 않았을 텐데. 깎이고 긁히고 부러지고 뒤틀린 게 녹록지 않았을 인고의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거리에 뿌리내렸다는 이유만으로 살을 파고드는 톱날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가로수.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가슴이 미어진다. 이 울림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 건지. 형체도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주변을 떠돌던 상흔이 고개를 내민다.

모난 감정 가운데 서서 깨진 유리 파편을 그린다. 뾰족한 날이 가슴을 긋고 간다. 저 끝에 있는 감정은 누구에게서 기원한 것일까. 기분이 나쁘다는, 그래서 그 불쾌감을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언사. 똑딱. 똑딱.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오후다. 긴장감은 더해지고 평정심은 그만큼 흔들린다. 정수리를 치고 나온 분노가 인형 놀이를 하듯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데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뜨겁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속은 냉기를 내뿜으며 나마저 기만하고 섰다. 목소리를 죽이고 시선을 떨군다. 감정의 파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싸늘한 벽을 만든다. 부대끼고 구역질이 나고 부아가 치미는 소용돌이 가운데 서서 생각한다. 대체 무엇이 이렇게까지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거냐고.

소리 지르지 않는다고 아픔마저 느끼지 않는 건 아니거늘. 한 번도 가지치기를 부탁한 적이 없건만 사정없이 살을 파고들고 뼈를 부러뜨리고 잎을 잘라내는 예리한 날들. 더불어 산다는 게 아무나 멋대로 나를 훼손해도 된다는 데 동의했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나는 그리고 어찌하여 너는 서로를 해하는데 이토록 무감각해져 버린 걸까. 주인 없는 시선에 익숙해지는 사이 상대의 감정에 그리고 내 속에 무디어지게 된 건 아니었을까.

하늬바람이 분다.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들어온다. 떨어져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고서야 깨닫는다. 내게 필요했던 게 딱 이만큼의 거리였다는 사실을. 그 공간을 가지니 들린다. 모난 말이 실은 아픔을 알려오는 외침이었다는 것이.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했다는 두드림이었다는 것이. 그리하여 그날의 갑갑함은 이렇게 해석된다. 상황이 내 욕망대로, 바람대로 움직여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생채기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유연하지 못하고 가지 하나 정도 아무렇지 않게 내주지 못하는 유약함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 가슴을 벤 건 단단하지 못한 나였다. 세사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터. 팔이 잘리고 심장에 금이 가기도 하고 눈앞이 까매지기도 하는 게 삶이라면 생은 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생애가 부여하는 시련을 감내하기만 하는 게 인생이라면 무엇을 위해 이 험난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걸까.

나뭇가지 위 수액 봉투를 본다. 투명한 주머니에 삐뚤빼뚤하게 이름이 적혀있다. 고사리손이 걸어두고 간 것이다. 여기저기 놓인 수액 봉투가 나무를 생기를 잃은 사물이 아닌, 언젠가 새 가지를 내고 다시 꽃을 피울 생명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고 보니 살얼음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생의 서사에 색을 더하고 훈기를 불어넣어준 건 무심하지만 따뜻한 저 덧댐이었던 것도 같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아플 것이다. 울기도 할 것이고 소리도 지를 것이고 억울함에 들끓기도 할 것이다. 쓰라림과 괴로움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더 연약해질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살의 터짐과 팔의 소실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고통에 예리한 촉수를 가지고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견디고 견디다가 숨이 차오를 때면 당신이라는 수액을 찾을 것이다. 어떤 편견의 눈도, 오해의 날도 세우지 않은 따스한 손이라는 훈기의 정수를 말이다. 낯 모를 이가 건네는 애상한 눈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던 순간이 있지 않았던가. 마음을 굳어가는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은 ‘그래, 살아내느라 애썼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라는 한마디였다. 허니 언젠가는 나 역시 괴로움에 신음하는 누군가에게 말없이 수액을 내어줄 것이다.

햇살이 곱다. 나뭇잎 위 반짝임에서 흑점을 본다. 까맣게 타버린 시간 앞에서야 비로소 환해지는 것이 빛이다. 어두워 보일 뿐 검은 점은 그것대로 내내 찬란함을 발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해를 넘어다본다. 상처 난 가슴 위로 수액이라는 생명이 별똥별이 되어 떨어진다. 당신이라는 따사로움이 빛이 되어 안긴다.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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