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고통을 모른다

그라는 무심(無心)

by GZ

조카의 탄생을 기다리던 날 엄마가 말했다. 여자라면 아이를 낳아 길러봐야 한다고. 그래야 어른이 된다고. 그 말을 들으며 올케의 눈물을 닦아냈다. 아프다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는 올케를 보며 생각했다. 출산과 다르지 않다는 글쓰기를 직업 삼으려는 나는 결혼이 아니면 정녕 어른이 될 수 없는가 하고.

뱃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나는 모른다. 밥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리고 신 게 먹고 싶어 진다는 입덧을 경험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언 배를 돌로 내려치는 것 같다는 고통도 알 리 없다. 아이를 낳고 어미의 이름을 가지게 된, 글을 써 본 적 없는 이들은 알까. 사고와 글자가 하나 되어 나타날 때의 전율이 어떠한지를, 적은 글을 들여다볼 때마다 털이 쭈뼛하게 서는 듯한 송연함은 또 어떠한지를.

뱃속 생의 요동을 상상한다. 글제로 머리가 간질거리고 쓰고자 하는 열망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게 하고 살아있음이 손을 움직이게 하는 순간의 설렘은 아기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와 닮아 있을까. 초고를 완성한 후의 든든함은 태동을 느끼는 것과 비슷할까. 퇴고로 말끔해진 작품을 보는 것은 눈 코 입을 가진 아기를 봤을 때에 닿아 있을까.

한 권을 위해 열 작품을 소각하며 나약한 나를 마주하는 길을 걸어온 나는 어미 됨이 무엇인지 모른다. 작가로 살기로 마음먹고 흰 종이를 자궁 삼아 살았기에 세간의 눈에 나는 성년도 아니다. 손가락 관절이 틀어지고 허리가 뻣뻣해지고 눈이 빡빡해지는 증상을 산후풍처럼 달고 산다 해도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출산의 임무를 다하고 어른이 된 성스러운 어미들. 젖을 물리고 밤을 지새우고 마음을 졸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 생까지 내준 여인들 저편에 또 다른 엄마들이 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과한 욕심을 부리고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 눈속임을 하고. 자식을 버리고 때리기는 걸 넘어 죽이기도 한다는 소식이 귀를 지나간다. 허리를 틀어보면 고통을 알게 된다던데 그 아픔이 어미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던데 그리하여 어른이 되게 한다던데. 인면수심의 철없는 어미들이 출산을 모르는 나보다 못해 보이는 이유는 뭔지. 잉태와 해산만으로 거저 어른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처자의 글이라 외면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원고지 만 장을 채우면 자궁이 열린다던데 이만 장을 넘어섰는데도 내 아이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이는 늘어가고 나는 나이를 먹고 세상은 대책 없이 아기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어미도 아니면서 생을 건 사투도 모르면서 무예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덜 영근 나는 오늘도 펜을 든다. 나보다 크고 길어 이젠 내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는 그 펜을 꼭 쥔다.

나는 허리가 틀린다는 말을 알지 못한다. 글을 쓸 줄만 알았지 책을 꾸려 본 적이 없기에 출간의 어려움도 모른다. 아픔이 뭔지 모르면서 펜 하나 믿고 상실을 이야기하고 슬픔을 노래하고 삶을 읊조린다. 고문서 같이 바랜 누런 종이 위에 남겨진 눈물. 그 속에 세상의 외침이 있다. 나를 찾아와 울고 웃고 쉬다간 사람들이 남긴 생의 씨가 들어 있다. 구구절절한 그들의 사연이 쓰라려 글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내 세월이 있다. 그 한 땀 한 땀을 어찌 출산에 비할 수 있을까. 살과 뼈가 있는 몸을 내놓는 것과 만져지는 실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쓰기를 무엇을 기준으로 한 곳에 놓을 수 있을까.

어미의 일은 아이를 먹이는 것이다. 작가의 업은 책을 읽고 생각을 곱씹고 사색을 글로 남기는 것이다. 내 아이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어미가 되고 아비가 된다고 절로 어른 이름을 달게 되는 것은 아닐 터. 시시때때로 나를 돌아보고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반추하며 성장해 나가는 것으로 우리는 비로소 성인이 된다. 출산을 모르는 나는 철없는 어른은 될 수 없지만 철든 아이는 될 수 있다. 인간은 아기를 낳고 기름으로써만 어미의 이름을 가지는 게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그 일을 꾸리고 완수해 내는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로 서게 된다. 아이가 출산한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내 머릿속 아이들은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다는 그 고통을 모른다.


Silence_Henry Fuse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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