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또 고프다. 이렇게 소화가 안 되는데 끊임없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병이다. 이 병증을 결핍이라 부른다. 나는 결핍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시간이 주어졌으니 쉬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지친 몸을 책상 앞에 앉히지 말고 몸을 바닥에 눕히면 된다.
밤이 가고 있는데, 야음이 짙어지고 있는데 왜 눈을 감지 못하는지. 누적된 피로로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어이하여 모니터 앞을 떠나지 못하는가. 무엇을 위해 밤잠을 설치며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는 건지. 긴 밤의 허기를 느끼는 것인지.
냉장고를 연다. 탄산수를 꺼낸다. 탄산의 청량함이 목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따가운데 시원하다. 식도를 틀어막고 있던 정체 모를 무엇이 저 아래로, 끝을 알 수 없는 아래로 나가떨어진다. 쿵. 배가 울린다. 속이 쓰라리다. 탄산수에 얼음을 넣는다. 솨아악. 기포가 인다. 투명한 물거품에서 바위 위 하얀 파도를 본다. 철썩. 물이 내려앉는다. 심장이 찌리릿 아려온다. 가슴에 허기가 인다.
배 안이 비었다. 탄산수 한 병을 비우고 냉장고를 다시 연다. 저녁에 먹는 음식은 독이다. 적어도 언제부터인가 소화력이 급격히 떨어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런데 자꾸 허기가 진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이 자꾸만 손을, 입을, 턱을 움직이게 한다. 뭔지도 모를 무엇을 입으로 집어넣는다. 이가 음식을 자르고 침이 그 조각을 버무리고. 파편이 된 입자가 어둠을 뚫고 지나가고.
속이 채워졌음에도 배가 고픈 아이러니. 더부룩한데 연이어 입속으로 뭔가를 집어넣는 역설적 행위. 배가 고프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 더 먹으면 탈이 난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는데, 배는 배꼽시계를 울려댄다. 그리하여 턱은 기계처럼 쉼 없이 움직인다. 저작 활동을 하며 넘침에 대해 생각한다. 과잉을 곱씹는다.
관계의 과잉, 정보의 과잉, 성취의 과잉. 수용의 과잉. 관대함의 과잉. 민감함의 과잉. 관심의 과잉.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성현의 말은 모자람을 잃은 현대인에게는 무의미한 표현이다. ‘과잉’ 상태가 보통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우리에게 모자람은 결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잉’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에 겸손, 중용, 절제는 사치인 것이다. 사치에 서툴러서 자꾸만 많이 먹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예민해지고, 많이 만나게 된다. 이러다가는 배가 터져버릴지도 모르는데 이러지 않으면 떠밀려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살을 불린다.
피로하다. 모든 것이 넘쳐흘러서. 방향도 알 수 없고 목적도 희미하기만 한 자기 계발이. 제이의, 제삼의 직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시대의 부름이. 알지도 못하는 지인을 늘려가야 하는 시류가. 쉼 없이 이력 갱신을 강요하는 세상의 요구가. 그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지 않은 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나와 같은 모습의 검은 그림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피로하게 느껴진다.
과유(過猶)가 불급(不及)을 압도해 버린 그림, 루시안 프로이트의 Benefits Supervisor Sleeping이다. 루시안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라는 사실과 더불어 꽤 높은 경매가로 미술계에 또 한 번의 소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그림 앞에서 소환되는 화가의 가족사도 경매가도 그림도 전부 과하다. 그림은 그림이어야 하고 작가는 창작자이어야 하며 예술은 예술로 남겨져야 하는 까닭이다. 소파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눈을 감고 누운 작품 속 여인이 평온해 보임은 습관이 된 피로가 화면을 잠식하고도 남을 지경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리라. 人怕出名 猪怕壯, 인간은 이름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홍루몽」의 한 구절을 곱씹게 되는 것은 센과 치히로의 한 장면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고 있는 탐욕의 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리라.
과하다.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