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처럼 똑 닮은 어린 형제 둘이 라면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있다. 작은 그릇을 받게 된 둘째가 제 몫의 라면이 적다며 칭얼거린다. 똑같이 담았다고 하는데도 큰 그릇에 담긴 형의 라면이 더 많이 보이는 모양이다. 형은 형 대로 제 것이 더 많다면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같은 양인데 보이는 것이 요술을 부리고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내용물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릇에 따라 음식은 양은 물론이거니와 맛과 색까지 다르게 느껴진다. 정확하게 저울로 재서 똑같은 양의 음식을 담는다고 해도 담긴 모양새가 달라지면 달리 느껴질 수밖에 없다. 먹는 것이 단지 입으로 들어가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눈으로 모양새를 보고 코로 향을 받아들이며 혀와 이로 식감을 느끼는 일종의 종합 연행이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두 아이에게 중요했던 것은 라면을 누가 더 많이 먹느냐였다. 그것은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그 속의 내용물의 양이 관건이 된다는 의미다. 양을 똑같이 나누었으니 아이들이 억울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아이들은 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도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며 더 많아 보이는 것을 원했다. 큰 그릇의 라면을 보며 울먹이는 막내를 달래며 생각했다. 아이니까 그럴 수 있겠지라고. 그 순간 내가 이 아이게 큰 잘못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같은 양의 라면을 넣어두고 더 많아 보이게 하여 작은 그릇의 라면이 팔리지 않게 만들어버린 사회의 수많은 눈속임에 나도 어마어마하게 피곤해져 있었다. 부당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보이는 게 그러하니 승복하지 않을 수 없고,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온 이들 모두 한 번은 넘어서야 할, 아니 어쩌면 평생 넘어서야 할 산이라고 하니 호소할 데도 없고. 내가 틀리지 않았는데 내가 틀렸다고 할 때의 그 억울함을, 네가 틀리지 않았더라 해도 참아 넘겨야 한다고 할 때의 분통함을 어찌 모를까. 그런 내가 아이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만 것이다.
아이는 똑같은 양의 라면을 다르게 보고 있고 나는 다르게 보이는 두 그릇의 라면의 양이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은 그릇에 담긴 적이 많았다는 이유로 같은 양을 만들어내야 하는 임무를 완수하고도 내쳐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왜 매뉴얼에도 없던 큰 그릇을 준비하지 않았느냐며 무능한 취급을 받았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지 않아도 우리가 그리고 우리 앞세대가 남긴 부당한 구조 때문에 속 터질 일 많을 아이들에게 어찌하여 그런 부당함을 앞서 보여주게 되었는지.
아이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일 것이고 그러하기에 큰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에서 공평과 공정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한다. 그것은 그만큼 불편부당한 일이 많아졌다는 것일 테고 그를 막기 위한 무수한 제도가 생겨나고 있다는 의미일 테다. 같은 그릇에 담겨 있지 않으면 같은 비교기준을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심리전에서부터 밀리는 한쪽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평과 균형, 공정을 말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조건을 먼저 마련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사회가 이 시대가 그런 세심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써 주었던가. 나아지고 있다고도 하고 나 또한 그것을 실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확실히 아직은 디테일이 부족하다. 나부터가 우선 라면 그릇 때문에 식사 자리를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리고서는 무심결에라도 그런 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공평하다거나 공정하다는 것은 양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기준, 그 일로 인해 평가를 받고 그것을 통해 성장을 거듭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핀다는 의미다. 그러하기에 하나의 독단적 기준만을 적용하거나 세세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같은 기준만을 적용하는 공평과 공정은 그 기준으로 평가대에 올라야 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공평과 공정을 성장의 자극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심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