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득할 수 없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그때마다 속이 부대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편해진다던데 마음이란 녀석은 실체도 모르겠고 비워서 비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이상 상대와의 부딪힘은 불가피할 텐데 그때마다 웃으며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인지 상대야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 의견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인지도 사실 잘 판단이 되지 않는다.
납득 불가능한 상황에 노출되어 선택의 주체가 되지 못할 때 인간은 패배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납득할 수 없으니 그 패배감도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은데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으니 속 쓰린 감정의 부대낌을 받아들이라고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대체 내가 원하지도 않은 이게 왜 내 손에 닿아서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문에 잠겨 있다 보면 나한테만 왜,라는 생각이 고개를 내민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도망친 것도 아닌데 번번이 반복되는 그 상황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무수한 상황이 사는 일 자체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가 참으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속도 모르겠는데 남의 속은 알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이 부대껴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공감과 동감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인간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바람이고 허상이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본 적이 없고 비슷한 상황에 있다고 해도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학 공식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있어 이해한다는 말은 사용하고 싶다면 내 식으로 당신의 상황을 나에게 설명해 두었다는 것으로 치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맹목적인 이해는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무모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또한 이해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납득할 수 있는 절차나 방식을 철저히 궁구해 마련해 둔다. 납득은 일종의 논리니까 오히려 그쪽을 견고히 해 두는 것이 의견의 부딪힘이나 갈등을 풀기에는 더 수월하다. 그렇다고 해도 납득의 기반을 마련해 두지 않았는데 무작정 수용하라는 일이 연이어지면 지치게 된다. 그것은 왜라는 의문을 가지는 두뇌의 작동을 막아서라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바쁜 세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선뜻 납득할 수 있는 일은 드물더라도 납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사고하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