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부재, 긴장감의 상실

by GZ

말에서 날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게 내가 민감해져서인지 세상의 무례가 늘어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상대의 말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어 그런 것이라 그 상황을 논리적으로 명징하게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로 인해 비롯된 나조차 설명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감정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진이 빠진다. 말이 나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되풀이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말이 자꾸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말은 사라졌는데 생각의 굴레만 남겨지게 되는 불가사의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불가해한 현상은 상대의 말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사고라는 것을 한다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더 많이 그리고 자주 하면 소통이 더 잘 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또 깊이 생각하면 상대의 말에 담긴 의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면 오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기대하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러한 가정이 애초부터 잘못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갈등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대화로 풀라며 마치 대화가 모든 갈등의 답이 되는 것처럼 말한다. 과연 그러했던가, 하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무리한 대화보다 때로는 침묵이 약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상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도 접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상대적으로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이 상대에 맞춰주는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런 대화는 양쪽 모두에게 폭력이 된다. 한쪽은 상대를 설복시켰다는 착각에 젖어 있게 되고 다른 한쪽은 불가능한 대화를 참아 주며 설명하기 힘든 패배감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대의 속마음 저 깊은 곳까지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비슷한 취미를 공유할 수는 있겠으나 상대는 내가 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어긋나는 지점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때로는 그 어긋남이 관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99%가 잘 맞는다고 해서 1%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 1%가 관계를 설정하는 무게중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99%의 가능성에 치중해 1%의 차이가 가져올 수 있는 파문이나 파장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갈등이나 오해는 여기에서 생기는데도 말이다.

1%의 차이를 살피는 것은 상대와 나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아무리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도 1%의 차이를 눈여겨보는 것은 좀처럼 잘되지 않는다. 1%는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긴장감인데 이미 어긋남에 지쳐버렸기에 매 순간 그 긴장감을 유지하며 친분을 맺어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대화가 부재하는 듯한 소통의 부재에 지쳤던 걸까? 사고의 완벽한 겹침은 존재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한 대화를 떠올려 본다. 소통은 어쩔 수 없이 어긋나기 마련이며 그 속에서 찰나의 닿음만 있어도 그 대화는 성공한 것이라는 접근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에 대한 내 멋대로의 기대에서 벗어나게도 되고 나 또한 1%의 긴장감을 망각해 누군가를 상처 주게 되는 불편함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이 또한 대화의 어긋남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얄팍한 수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애써 뱉은 말이 상처가 되어 가슴에 박히는 아이러니한 대화의 부자유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이제는 그 자유를 누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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