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라는 말이 있다. 리더가 되는 쪽을 택하라는 취지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용과 뱀의 우위와 머리와 꼬리의 우위가 어떻게 왜 정해지는지 하는 것이다. 용은 용인대로 의미가 있고 뱀은 뱀인 대로 가치를 가지며 머리는 머리 역할을 하고 꼬리에는 꼬리에 맞는 역할을 한다. 대관절 누가 왜 용과 뱀을 비교하며 머리와 꼬리에 위계를 세우는 걸까.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불편함을 느낀다. 용은 실재하지 않는 동물이고 뱀은 지상의 생물이다. 신화 속 용은 꿈과 희망, 권력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용하다. 뱀은 현실에 존재한다. 하지만 독을 가지고 있기도 하여 위협적일 수 있다. 그러니까 두 동물은 존재하는 계가 다르며 그에 따라 존재 의미도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용의 꼬리니 뱀의 머리니 하는 것은 용과 뱀, 머리와 꼬리로 위계 지워 놓은 질서에 편입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일 수 있다.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함께 혐오의 단어들을 떠올리게 된다. 금수저, 흙수저, 지잡대, 지균충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폄훼와 폄하의 단어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경제적으로 많이 가진 것, 화려해 보이는 것, 지적으로 충만해 보이는 것 같은 것으로 인해 그렇지 않은 것들이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누구를 위한 위계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빠듯한 사람들은 금이니 흙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세상의 말대로 금을 타고나지 못한 그들은 금이 없는 까닭에 주어진 일을 쳐내기 만으로도 바쁘다. 허니 흙이 주어진 것을 불평하고 앉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수저 앞에 금을 붙였다가 흙을 붙이기를 반복하는 것은 시간이 넘쳐나는 그들에게 통용되는 놀이지 진정성 있게 자신의 생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이야기다.
여유 있는 사람들의 ‘수저’ 놀이에 내 인생과 나의 노력이 도구로 쓰인다고 생각하면 그건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 든다. 수저 따위로 내 인생을 판가름하는 데 동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그 수저에는 나라는 사람이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저에 새겨진 이름이라면 몰라도 수저만으로 판단하기에 나는 사실 너무 귀한 존재다.
그래서 수저와 집안이 함께 언급될 때마다 속으로 외치고는 한다. ‘수저’로 남의 인생을 멋대로 가지고 놀 시간에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더 집중하라고. 당신들이 짓밟고 있는 그 흙수저는 밥을 뜨느라 바쁜 게 아니라 땅을 골라 세상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고. 그렇게 숟가락에 매달려 여유 부리고 있다가는 흙을 골라가며 만든 세상에 먹힐 수 있다고.
사람들은 끝없는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 한다.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 적당한 성취를 위안 삼기도 한다. 성취의 한계를 만들고 세상과 타협했음이 세사의 방식에 동의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게 곧 나의 결핍을 흙수저로 받아들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나의 노력을 쉬어갈 지점을 결정한 것뿐, 나의 한계를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감하게 선언해도 된다. 나는 용 꼬리에도 뱀 머리에도 관심 없다고. 그딴 건 당신들 대화 속 안주나 삼으라고. 나는 내가 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