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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31. 2022

두가지 이야기

20221231

첫번째 이야기.


남편은 결혼 후에 아내에게 한 번도 월급봉투를 가져다준 적이 없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불신인지, ‘여자’로 한정된 이성에 대한 불신인지, 아니면 그저 아내에 대한 불신인지 아내는 알 수 없었다. 본인의 수입은 혼자서만 관리했고, 아내에게는 주기적으로 생활비를 주기만 할 뿐 재산의 상황도 공유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물어보면 두루뭉술하게 대답은 했으나 솔직하게 오픈한 적은 없었다. 아내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내 또한 남편의 애매한 그 말들을 믿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불신과 비밀이 커져만 갔다.


남편은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회사원이기에 연봉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아내가 받는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장남인 남편에겐 동생들이 있었는데,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동생들은 부부의 집에 얹혀살았다. 아내는 당시에 학생이었던 시동생들의 교복을 다리고 도시락까지 싸 줘가며 집에서마저 팔자에도 없는 시집살이를 했다. 입이 많으니 남편이 주는 생활비로는 살림이 빠듯했다. 동네 아줌마들을 따라 부업도 해 봤지만, 남편이 그마저도 못하게 했다. 가정 내의 경제권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가부장적인 남편의 반대로 아내는 집안일을 제외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허락을 얻어 한동안은 가게도 운영해봤으나 뜻대로 잘 되진 않았다. 시동생들은 졸업해 하나둘 독립했지만 그간 아이가 둘이 생겨 살림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키우면 식비 외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는 건 당연했음에도, 남편은 아내의 가계부에 의심을 갖는다. 아내는 지속적으로 생활비 부족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껴쓰라는 말 뿐.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즈음,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아내는 남편 몰래 판매 영업직이라도 시도해 본다. 화장품 방문판매도 해 보고, 당시 한창 유행하던 정수기를 팔기 위해 아이의 학교에도 따라가 열심히 홍보했다. 곧 남편이 알게 되어 그마저도 못하게 됐지만.


아내는 외로웠다.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도 많았지만 남편은 그에 대한 지지는커녕 집구석에 가둬놓고 자신이 준 돈으로 하루종일 집안일만 하기를 바랐다. 무엇이 그리도 불안했을까. 남편은 본인이 주는 생활비 외의 돈이 왜 더 필요하길래 아내가 몰래 영업까지 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그 의심은 더 커져갔다.


아내는 우연히 한 남자를 알게 된다. 남편과는 달리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사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 남자의 입장에서, 남편에게 그런 취급을 받고 사는 여자를 꾀기는 아주 쉬웠으리라. 남자는 남편의 아내에게 급한 일로 돈이 필요하다 했고, 본인의 재산이라고는 매주 받는 생활비가 전부였던 아내는 지인들에게 부탁해 돈을 구해다 준다. 돈을 챙긴 남자는 당연한 수순으로 연락을 끊는다.

아내를 의심하던 남편은 아이에게 아내의 동선을 캐물어 결국엔 아내의 외도가 들통난다. 아내는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는다. 남편은 분노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때린다. 아이는 자기의 증언으로인해 엄마가 아빠에게 맞는 걸 보고 있어야만 했다. 사기당해 지인들에게 빌렸던 그 돈은 남편이 모두 대신 갚았다. 그 덕에 아내는 이전보다 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된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아내는 견딜 수 없던 그 집을 기다렸단 듯이 떠난다. 증오의 대상을 잃어버린 남편의 아내를 향했던 불신들은 집에 남은 딸에게 자연스레 투영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큰아이가 어른이 되어 결혼할 무렵, 드디어 부부는 서류상의 이혼 절차를 마친다. 막내는 오빠의 결혼과 부모의 이혼을 동시에 축복했다.


훗날 아주 우연히 첫사랑을 마주치게 된 아내는, 자신이 그때 이 남자와 결혼했다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두번째 이야기.


남자는 회사의 동기들과, 여자는 친구들과 함께 휴가철에 떠난 여행지에서 운명처럼 서로를 만난다. 남자의 무리는 나이대도 비슷하고 머릿수도 맞아 보이는 여자의 무리에게 작업을 걸어 같이 놀자고 제안한다. 여자의 무리는 바닷가의 분위기에 취해 못 이기는 척 함께 보내기로 한다. 여자는 군대에 간 남자친구와 얼마 전 헤어진 상태였기에 이런 상황들이 환기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짝지어진 남자와 여자는 청춘이었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다음날, 헤어지기 아쉬웠던 남자는 여자의 연락처를 물어왔고 여자도 싫지 않았는지 순순히 준다. 그렇게 둘의 연애가 시작된다. 짝지어 함께 놀던 남녀 무리 중 커플이 된 사람은 그 둘 뿐이었다. 서로 다른 곳으로부터 여행 온 거였기에 자주 볼 순 없었지만, 장거리 연애치고 다행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시간과 장소를 조율해 어렵게 약속을 잡아 만나는 데이트 시간은 짧게 느껴질 만큼 애틋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남자의 동생이 여자를 찾아온다. 여자는 동생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형에게는 이미 고향에 오래전부터 집안끼리 정해 둔 정혼자가 있으니, 일 어렵게 만들지 말고 헤어지라는 말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여자는 믿을 수 없었다. 남자에게 전화해 사실이냐고 따져 물었고, 남자는 정황은 사실이나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에게 직접 찾아온 남자의 동생에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집안의 반대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여자는 남자에게 이별을 고한다.


남자는 여자를 그냥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부모님은 아들이 다른 여자를 만난 걸 알고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정혼자와의 결혼 날짜까지 잡아버린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없던 남자는 결국 큰 결심을 하고서 정혼자의 집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를 드린다. 파혼의 댓가로 뺨까지 맞는다. 양가 모두의 비난 속에서도, 남자는 여자를 되찾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 보려 한 거다. 뒤늦은 상황 정리가 끝나고 곧 여자를 찾아가 정식으로 청혼한다.


여자의 생각에 정혼자와의 혼인을 파혼까지 하고 온 남자라면 자신을 위해 뭐든 해 줄 사람인 것만 같았다. 여자의 가족들은 남자를 허락했고, 여자도 남자의 집에 인사를 가게 된다. 지난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남자의 가족들은 여자가 탐탁지 않았다. 동생은 여자를 찾아가 충고까지 했었으니 상황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의지를 보았던 가족들은 모든 걸 내려놓고 결혼을 허락하기로 한다.


여자는 결혼 후에 시댁의 마음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종갓집의 맏며느리 노릇이 결코 쉬운 게 아니었지만 힘든 티 한번 내지 않았고, 남편의 말은 무엇이든 따랐다. 쉽지 않았던 이 결혼의 배경이 그러했으니 그저 견뎌야만 했다. 시댁에서 부르고 시키면 무엇이든 했다. 시부모의 마음에 들고 싶어 시동생들도 기꺼이 데리고 살며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자는 여자에게 한 번도 월급봉투를 가져다준 적이 없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불신인지, ‘여자’로 한정된 이성에 대한 불신인지, 아니면 그저 아내에 대한 불신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


삼십여 년 후 아주 우연히, 여자는 군대 때문에 헤어졌던 젊은 시절의 남자친구를 마주치게 된다. 남자는 당시 전역을 앞두고 여자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어 아주 속상했었다며,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도대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느냐고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질문을 하면서 반갑게 미소지었다.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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