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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Feb 28. 2023

비행기 모드

20230228

감수성이 예민하면 일상생활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에 남들보다 체감하는 피로도가 크다. 사소한 것에도 감정이 올라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다가, 웃다가. 이렇게 쓰면 오해가 생길까 싶어 굳이 해명하자면 적어도 내가 아는 나의 상태는 우울증이나 조증이 아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면, 모르는 사람이 쓴 위로의 댓글 하나에도 크게 감동 받아 가슴이 저리고, 지는 노을을 볼 땐 태양 빛의 경계선에서 지구의 자전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난다. 화분에 물을 주다가 실수로 작은 가지 하나라도 꺾이면 내 손가락이 꺾인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져 식물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그저 그때의 작은 감정에도 온 마음을 다해 충실할 뿐. 물론 이건 미화된 해석이고 남들이 보기엔 그냥 주책에 불과해서, 대놓고 그런 감정들을 매번 표출하면 대가리 꽃밭인 미친년 취급받기 십상이므로 나의 경우엔 억누르고 절제하는 법도 패치가 되어 있다. 하지만 태생이 예민충이고 하필 또 여성이기에 대자연의 섭리대로 조금 더 감정적인 날이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컨디션에 유동성이 없을 순 없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극이 일정한 역치를 넘어서면 저항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자칫하면 미친년이 될 위기에 놓이는 거지. 그리고 억누르는 것 자체도 사실 에너지 소모가 상당한 일이다. 감정적으로 +1 타격을 얻었는데 그걸 티 내지 말아야 하니 또 한 번의 +1 타격으로 체력 소모가 두 배. 그래서 이런 척 저런 척할 필요가 없는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좋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잠들기 전 이불속에 누워있을 때. 그때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좋으면 좋은 대로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그대로 둬도 날 판단할 사람이 없다. 좋을 땐 이불을 양탄자 삼아 둥둥 떠다니는 상상을 하며 한껏 좋아해 버려도 되고, 나쁠 땐 한없이 추락해 지구 내핵까지 바닥을 쳐도 된다는 말이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테니까.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예민충들은 피로가 쉽게 누적되기 때문에 회복되는 속도도 더디고 사실상 회복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스마트폰에 비유하자면, 하루 종일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거기에 GPS와 NFC에 테더링까지 켜져 있는 상태. 난리 남. 웬만한 자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원치 않아도 불필요한 것들까지 나도 모르게 감지하다 보니, 당연히 배터리 소모량이 클 수밖에 없고 그만큼 충전 시간도 오래 걸린다. 심지어는 사람도 스마트폰처럼 충전 중에도 앱을 사용해야 할 일이 있고, 때로는 급속 충전이 되기도 한다. 하여간 방전되기 전에만 충전기를 꽂아준다면, 어쨌든 하루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순 있다.


내가 잠이 많은 이유다. 뭐, 단순히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수면에 관한 연구 결과가 예전보다 많이 보이게 되면서 나의 이 게으름이 그럴싸한 타당성을 얻는 것 같아 솔직히는 은근 좋긴 했거든. 특히 적정 수면시간은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다는 그 말. 앞에 쓴 내용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나는 남들보다 잠이 훨씬 많은 편인데도, 현실적으로는 수면시간이 평균보다도 오히려 짧다. 적어도 열 시간은 자 줘야 잠다운 잠 좀 잔 것 같고 개운할 텐데도 매일 많아 봐야 겨우 대여섯 시간을 잔다. 일어나야 할 시간에 맞춰 알람 시계를 켜두는 그 짓을 하지 않고 걱정 없이 잠들어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만은 원 없이 푹 자야지- 하는 그런 거. 그래서 코시국 초기, 모두가 바이러스를 두려워할 때도 실은 '나도 한 번만 걸려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 “아이고, 이런. 어쩔 수가 없네?” 하며 드디어 쉬어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 슈퍼 항체라도 가졌는지 박복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성적으로 피로한 내 몸속은 바이러스조차도 도저히 눌러살기 싫은 곳인가 봄. 이러나저러나 바이러스 개새끼임.


그런 의미에서 하루 종일 자고 또 자는 게 일상인 우리 집 고양이들 개부럽. 물론 수면 이외의 회복 방법도 당연히 있고, 그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다. 나의 경우엔 맛있는 것을 먹는다던가, 고양이를 만진다던가, 고양이를 안는다던가, 고양이 발 냄새를 맡는다던가, 고양이가 맛있게 먹는 걸 지켜 본다던가, 고양이가 자는 걸 지켜 본다던가.


생각해보니 외부의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도 머릿속은 혼자서 내내 바쁘다. 한창 일에 치여 살 때는 퇴근 후 머리 좀 식힐 겸 일부러 옥상에 올라가 대자로 드러누워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만 시야에 둔 채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렇게 가장 평온한 상황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이런저런 생각들에 또 울다가 웃다가 하더라. 명상 불구자.

정말 자는 것 말고는 생각을 비울 방법이 없는 걸까. 아니지, 램수면 상태에서는 자면서도 꿈을 꾸니까, 그냥 나는 영원히 고통받는 걸지도.


스마트폰처럼 비행기 모드도 되면 좋으련만.


처음엔 그냥 이런 생각이지 않았을까, 유아인 배우도.

프로포폴이란 물질은 보통 전신마취에 사용되지만 소량 사용시엔 수면 유도 및 숙면에 도움을 주어 불면증 처방에도 사용된다고 한다. 인간에게 기본 스펙으로 탑재되지 않은 인위적 [비행기 모드] 버튼인 셈이다. 근데 이제 심각한 중독성과 부작용을 곁들인.


우선 본인은 유아인 배우의 팬이 아님을 밝힌다. 그다지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던 사람은 아니지만, 배우라는 본업에 진지한 것은 물론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리드하며 의미 있는 활동을 하던 그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다양한 방면의 예술에 세심한 관심을 갖고 그걸 다시 대중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사명감 같은 걸 가진 사람 같았다. 커리어에 타격을 입을 만한 사건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 있는 발언을 하던 그이기에 그런 부분에 대해 리스펙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뉴스가 비극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과거에 그는 마약에 연루되었던 다른 이를 비판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랬던 그에게 프로포폴뿐 아니라 대마와 다른 마약까지 검출되었다고 하니 단순히 본인의 불면증을 핑계로 변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프로포폴만 해도 일반적인 처방 사용량을 훌쩍 뛰어넘는 명백한 상습적 남용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미 정당화될 수 없다. 인지도와 호감도만큼 배신감은 비례하고,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겠다. 후에 그가 복귀를 하더라도 이 사건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평생을 괴롭히겠지.


무엇이 심지가 굳던 그런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었을까. 나 또한 영화와 예술에 관심이 깊은 대중의 한 명으로서, 어느 쪽으로나 독보적이고 영향력 있던 그런 사람이 이토록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그저 매우 안타까웠다. 그리고 비슷한 성향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어떠한 공식 입장도 변명도 해명도 호소도 사과도 없는 지금의 그가, 쌩뚱맞게도 걱정이 되더라.

말도 생각도 많고 자기주장도 강해, 쓴소리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못 참아 늘 남을 가르치려고 드는, 강해 보이면서도 위태로워 보이는, 결핍과 중독이 복잡하게 공존하는, 실수투성이인,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처음 약물에 손을 대면서부터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이렇게까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연에 대해 왠지 들어주고 싶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가정하면 말야, 어쩌면 나도 그런 유혹에 빠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누구였대도, 그 상황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재능과 외모와 부를 겸비한 스타들이 모두가 다 마약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큰 의지와 무거운 중심과 배경적 조건들(옳은 길로 이끌어 줄 진짜 내 편인 주변인들)을 대단히 필요로 하는 거라면.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엘리베이터에서 맡은 치킨 냄새에 한순간 무너져 결국 배민을 누르는 평범한 우리들 처럼, 그들도 사람이라서 잠시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던 거라면.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나는 그의 침묵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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