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알록달록 Jun 05. 2023

최애 고객

20230605


“안녕하세요.”


귀에 익으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인사를 하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단골 학생이다. 근처에 학교는 많지만 모두 세 블록 이상은 떨어져 있고 학교 근처에도 이미 편의점은 많아서, 자주 오는 단골 중에 학생이라고는 이제 이 녀석뿐이다. 전에 요 앞 상가에 학원이 있을 때는 그래도 교복 입은 무리가 제법 보였었는데. 여기가 원룸촌이다 보니 학교에 다니는 2세를 둔 가정은 다들 큰길 건너편 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모양이다. 8년 동안 한자리에서 장사를 하면 의도치 않게 손님들의 개인사까지 알게 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미혼모인 엄마와 형과 함께 셋이 산다. 형은 엄마가 학생 때 낳은 자식이라서 얘랑은 나이 터울이 제법 크고(형이 내 또래니까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썩 안 닮았으니 모르긴 몰라도 서로 아빠가 다를 거다. 한창 성장기라 애가 볼 때마다 키가 쑥쑥 커가지고 지금처럼 먼저 인사하며 아는 척 않으면 그냥 어른인 줄 알겠다. 사실 인사했어도 잠깐은 못 알아봤다. 변성기라서 목소리가 내가 알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 오랜만이네.”


“수학여행 다녀왔어요.”


“오 좋았겠다. 어디로 갔다 왔어?”


“제주도요.”


‘제주도 좋지’라며 아는 체라도 하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제주도 가 본 지가 십 년도 더 돼서 요즘의 제주도를 모르니 뭐가 어떻다고 할 만한 말이 없었다. 하긴, 안다고 한들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가는 ‘라떼는 말이야’ 하는 꼰대 같아 보일 테니 말을 아껴야지.


“재밌었어? 더워지기 전에 날씨 좋을 때 잘 갔다 왔네.”


“네. 근데 2박 3일이라 짧아서 아쉬웠어요.”


“그러게, 짧긴 하다. 봉투 담아줄까요?”


“네, 주세요.”


며칠에 한 번 이렇게 잠깐씩 들르는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요즘 애들치고는 착하고 인사도 잘하고 예의 바른편이다. 편의점에 오는 학생 애들은 내 기준으로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부류로 나뉘는데, 가장 흔한 건 여럿이 무리 지어 다니면서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욕이 섞인 말을 뱉으며 중 2병에 취해있는 녀석들과, 반면 눈 마주치기도 어려워해 내내 시선을 피하면서 ‘젓가락 줄까요?’ 정도의 질문에도 고갯짓으로만 대답하는 소심한 녀석들이다. 보통은 전자의 녀석들이 혼자 올 땐 후자의 모습을 보이므로 이 두 케이스는 상호호환이 가능하다. 대부분이 이런 식이고, 드물지만 세 번째로는 인사성도 밝고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도 부담 갖지 않는, 우리 단골 학생 같은 아이들. 어른에게 지폐를 드릴 때는 구겨진 돈을 잘 펴서 두 손으로 건내는 게 예절이라는 걸 아는 애들도 얘네뿐이다. 백퍼 가정 교육이라는 말임. 그리고 그게 ‘가정 환경’과는 별개의 이야기라는 말임. 전에도 썼지만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도 어떤 사람의 의식하지 않은 인성과 본성을 관찰할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다. 뭐, 반박시 니 말이 다 맞음.


저 녀석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순하고 인사도 참 잘하긴 했는데 지금보다 철딱서니가 좀 없긴 했었다. 나이 많은 엄마와 나이 많은 형 밑에서 막둥이로 자란 녀석이라 나름대로 오냐오냐 키워진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워낸 엄마는, 돈 버느라고 막내를 늘 혼자 두어야 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이 컸는지 원룸 셋방에 살면서도 고작 초등학생인 아들의 간식비를 두둑이도 챙겨 줬다. (덕분에 늘 토실토실했다.) 녀석은 엄마가 힘들게 번 돈을 제게는 아낌없이 준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교가 끝나고 나면 만 원 이만 원씩 팔랑팔랑 들고 와서는 먹고 싶은 것들을 잔뜩 골랐다. 친구들과 PC방을 가거나 어디 놀러 가는 날이 아니면 매일 같이 들러 사 갔으니 나중에는 다 먹어본 것들뿐이라서, 한참을 고르다가 “에휴, 먹을 게 없네.” 하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얌마,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먹을 게 없다니, 여기가 이 동네에서 먹을 거 제일 많은 덴데!”라고 하면서 신상 들어온 걸 알려주고 그랬다. 어린놈의 새끼가 뭘 안다고 까탈을 부리는 게 개킹받고 귀여웠다. 지금도 그날의 투정을 생각하면 하찮아서 웃음이 나온다.


그랬던 녀석이 어느덧 고 3을 앞두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어색해하며 처음 교복을 입고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징그럽다. 저번에 진로를 물었더니 요리사가 되고 싶어서 벌써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확실히 잘 먹는 애들이 직접 하는 것도 잘한다. 주방에서 일하는 엄마의 영향도 있었겠다.


가게 시작하기 전 개업을 준비하면서, 신규 점주를 대상으로 본사의 감독하에 기존에 영업 중인 다른 매장에 방문해 몇 차례 실전 교육을 받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장사하기 전엔 별놈의 일 다 해 봤지만 막상 가장 베이직한 편의점 알바는 의외로 해 본 적이 없었어서, 교육 첫날부터 아침 일찍이 출근해 해당 점포 점주님에게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애가 우유를 사러 들렀다. 점주님은 학생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만 “어? 요놈 봐라! 수염이 났어? 세상에, 그 코흘리개가 남자가 다 됐네!!”라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점주님이 학생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는 시늉을 하자, 학생은 “아이, 하지 마세요. 사람들 있는데 창피하게.” 하면서 얼굴부터 목까지 빨개졌다. 학생이 부끄러워서 얼른 계산하고 나가려고 하니까 점주님은 그게 귀여웠는지 더 짓궂게 놀려댔다.


“얌마, 너 꼬추에도 털 났냐? 이리 와 봐!!”


갑작스러운 음모 드립에 가게 안에 있던 교육생들과 본사에서 온 OFC, 다른 손님들까지 모두 빵 터졌다. 요즘 같았으면 프로불편러들이 성희롱이니 뭐니 할 법도 한 발언이었을진 몰라도, 정말로 감동에 벅차올랐던 그분의 숨길 수 없는 표정에서 함께 진심을 느꼈고, 한겨울이었지만 그 공간이 따뜻했다. 그 미소가 8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본사도 교육자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날 아침의 재미있는 장면 하나로 나는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볼 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작가의 이전글 똥내 나는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