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귀에 익으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인사를 하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단골 학생이다. 근처에 학교는 많지만 모두 세 블록 이상은 떨어져 있고 학교 근처에도 이미 편의점은 많아서, 자주 오는 단골 중에 학생이라고는 이제 이 녀석뿐이다. 전에 요 앞 상가에 학원이 있을 때는 그래도 교복 입은 무리가 제법 보였었는데. 여기가 원룸촌이다 보니 학교에 다니는 2세를 둔 가정은 다들 큰길 건너편 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모양이다. 8년 동안 한자리에서 장사를 하면 의도치 않게 손님들의 개인사까지 알게 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미혼모인 엄마와 형과 함께 셋이 산다. 형은 엄마가 학생 때 낳은 자식이라서 얘랑은 나이 터울이 제법 크고(형이 내 또래니까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썩 안 닮았으니 모르긴 몰라도 서로 아빠가 다를 거다. 한창 성장기라 애가 볼 때마다 키가 쑥쑥 커가지고 지금처럼 먼저 인사하며 아는 척 않으면 그냥 어른인 줄 알겠다. 사실 인사했어도 잠깐은 못 알아봤다. 변성기라서 목소리가 내가 알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 오랜만이네.”
“수학여행 다녀왔어요.”
“오 좋았겠다. 어디로 갔다 왔어?”
“제주도요.”
‘제주도 좋지’라며 아는 체라도 하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제주도 가 본 지가 십 년도 더 돼서 요즘의 제주도를 모르니 뭐가 어떻다고 할 만한 말이 없었다. 하긴, 안다고 한들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가는 ‘라떼는 말이야’ 하는 꼰대 같아 보일 테니 말을 아껴야지.
“재밌었어? 더워지기 전에 날씨 좋을 때 잘 갔다 왔네.”
“네. 근데 2박 3일이라 짧아서 아쉬웠어요.”
“그러게, 짧긴 하다. 봉투 담아줄까요?”
“네, 주세요.”
며칠에 한 번 이렇게 잠깐씩 들르는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요즘 애들치고는 착하고 인사도 잘하고 예의 바른편이다. 편의점에 오는 학생 애들은 내 기준으로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부류로 나뉘는데, 가장 흔한 건 여럿이 무리 지어 다니면서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욕이 섞인 말을 뱉으며 중 2병에 취해있는 녀석들과, 반면 눈 마주치기도 어려워해 내내 시선을 피하면서 ‘젓가락 줄까요?’ 정도의 질문에도 고갯짓으로만 대답하는 소심한 녀석들이다. 보통은 전자의 녀석들이 혼자 올 땐 후자의 모습을 보이므로 이 두 케이스는 상호호환이 가능하다. 대부분이 이런 식이고, 드물지만 세 번째로는 인사성도 밝고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도 부담 갖지 않는, 우리 단골 학생 같은 아이들. 어른에게 지폐를 드릴 때는 구겨진 돈을 잘 펴서 두 손으로 건내는 게 예절이라는 걸 아는 애들도 얘네뿐이다. 백퍼 가정 교육이라는 말임. 그리고 그게 ‘가정 환경’과는 별개의 이야기라는 말임. 전에도 썼지만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도 어떤 사람의 의식하지 않은 인성과 본성을 관찰할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다. 뭐, 반박시 니 말이 다 맞음.
저 녀석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순하고 인사도 참 잘하긴 했는데 지금보다 철딱서니가 좀 없긴 했었다. 나이 많은 엄마와 나이 많은 형 밑에서 막둥이로 자란 녀석이라 나름대로 오냐오냐 키워진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워낸 엄마는, 돈 버느라고 막내를 늘 혼자 두어야 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이 컸는지 원룸 셋방에 살면서도 고작 초등학생인 아들의 간식비를 두둑이도 챙겨 줬다. (덕분에 늘 토실토실했다.) 녀석은 엄마가 힘들게 번 돈을 제게는 아낌없이 준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교가 끝나고 나면 만 원 이만 원씩 팔랑팔랑 들고 와서는 먹고 싶은 것들을 잔뜩 골랐다. 친구들과 PC방을 가거나 어디 놀러 가는 날이 아니면 매일 같이 들러 사 갔으니 나중에는 다 먹어본 것들뿐이라서, 한참을 고르다가 “에휴, 먹을 게 없네.” 하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얌마,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먹을 게 없다니, 여기가 이 동네에서 먹을 거 제일 많은 덴데!”라고 하면서 신상 들어온 걸 알려주고 그랬다. 어린놈의 새끼가 뭘 안다고 까탈을 부리는 게 개킹받고 귀여웠다. 지금도 그날의 투정을 생각하면 하찮아서 웃음이 나온다.
그랬던 녀석이 어느덧 고 3을 앞두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어색해하며 처음 교복을 입고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징그럽다. 저번에 진로를 물었더니 요리사가 되고 싶어서 벌써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확실히 잘 먹는 애들이 직접 하는 것도 잘한다. 주방에서 일하는 엄마의 영향도 있었겠다.
가게 시작하기 전 개업을 준비하면서, 신규 점주를 대상으로 본사의 감독하에 기존에 영업 중인 다른 매장에 방문해 몇 차례 실전 교육을 받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장사하기 전엔 별놈의 일 다 해 봤지만 막상 가장 베이직한 편의점 알바는 의외로 해 본 적이 없었어서, 교육 첫날부터 아침 일찍이 출근해 해당 점포 점주님에게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애가 우유를 사러 들렀다. 점주님은 학생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만 “어? 요놈 봐라! 수염이 났어? 세상에, 그 코흘리개가 남자가 다 됐네!!”라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점주님이 학생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는 시늉을 하자, 학생은 “아이, 하지 마세요. 사람들 있는데 창피하게.” 하면서 얼굴부터 목까지 빨개졌다. 학생이 부끄러워서 얼른 계산하고 나가려고 하니까 점주님은 그게 귀여웠는지 더 짓궂게 놀려댔다.
“얌마, 너 꼬추에도 털 났냐? 이리 와 봐!!”
갑작스러운 음모 드립에 가게 안에 있던 교육생들과 본사에서 온 OFC, 다른 손님들까지 모두 빵 터졌다. 요즘 같았으면 프로불편러들이 성희롱이니 뭐니 할 법도 한 발언이었을진 몰라도, 정말로 감동에 벅차올랐던 그분의 숨길 수 없는 표정에서 함께 진심을 느꼈고, 한겨울이었지만 그 공간이 따뜻했다. 그 미소가 8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본사도 교육자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날 아침의 재미있는 장면 하나로 나는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볼 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